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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이 일상이 된 병원 2020년에 한국인의 75.6%는 병원에서 사망했고, 2023년 총 사망자 수는 약 35만 명이었다. 대략적으로 산출하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약 26만 명이 병원에서 사망을 했다. 병원은 한국인의 가장 보편적인 사망 장소이고, 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인이라면 어쩔 수 없이 반복해서 환자의 사망을 경험해야 한다. 하지만 병원 임종은 그다지 존엄한 모습이 아니다. 병원이 생명을 살리는 데 최적화된 공간인 만큼,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는 존엄성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일반인과 의료인 모두 죽음에 대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고, 그 이해도 빈곤하다 보니 양측 다 오로지 치료에만 전념하게 되고, 이는 연명의료와 질질 끄는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 과정에서 의료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중환자실 간호사였던 김형숙 교수는 저서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에서 그런 혼란을 이렇게 말한다. “훨씬 위중한 환자들, 더 복잡하고 첨단화된 기술, 그 가운데서 나는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심폐소생술을 비롯하여 우리가 하고 있는 처치들이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 여길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도 없었다. 멈춘다는 건 곧 생명을 포기하거나 경시하는 일이 되는 것만 같았고, 그래서 깊은 회의를 느끼면서도 맹목적으로 죽음의 반대 방향으로 환자를 잡아끌고 버티는 기분이었다. 나만 그랬을까? 의료진뿐 아니라 환자나 가족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은 때가 많았다. 나와 동료 간호사들은 환자들의 죽음 자체보다는 끝도, 의미도 알 수 없이 환자들이 견디어 내던 그 시간들을 더 힘들어 할 때가 많았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2004년 영국의 간호학회지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Everyday death: how nurses cope with caring for dying people in hospital?(일상적인 죽음: 간호사들은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가?)”. 연구자들은 병원 간호사들에게 오늘날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현상이며, 이는 상당한 심리적 부담과 스트레스를 야기하고 있다며 그들에게 임종돌봄의 전문성뿐만 아니라 죽음 불안을 관리할 수 있는 교육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2. 죽음의 의료화와 연명의료 병원에서 죽음을 일상으로 마주하게 되면서 의료인은 거리를 두고 죽음을 의학적 사건으로 처리하면서 업무를 감당하고 자신의 감정을 보호하게 된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인격적으로 다가가는 것은 감정의 소진과 함께 업무의 지연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존엄한 죽음이라는 추상적 가치에 얽매이는 순간 신속한 의학적 처치가 어려워지면서 더더욱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의학적 최선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서 매뉴얼 또는 법적 기준에 따르려 노력하게 되고, 이런 태도는 살면서 인간적 죽음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 없는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김형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료진은 결정적인 순간에 ‘가족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명분 뒤로 숨었고, 가족들은 혹시나 작은 가능성이라도 놓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선택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애매한 상황에선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 의료인에게 허용된, 가장 안전하고 도덕적인 대처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되도록 내 감정을 무시하고 과학이 혹은 표준 매뉴얼이 추천하는 방식으로 보고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의학적 매뉴얼이 정하는 최선은 연명의료로 이어지게 된다. 환자를 전인격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배운 적도 훈련받은 적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각종 검사 결과와 모니터상의 생체징후에 따라 해야 할 의학적 처치를 기계처럼 수행할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환자는 말기암환자이든, 고령의 노인이든 중환자실에서 연명의료를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2019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종합병원 중환자실 입원환자의 56.1%가 70대 이상 노인이었으며, 심지어 90대가 전체의 5%를 차지하고 있었다. 병원 시스템은 환자의 생명을 최대한 연장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이로 인해 임종기 환자에게 불필요한 검사, 시술, 투약 등 과도한 연명 치료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환자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죽음이 의료적인 절차로 변질되면서 환자의 인간적인 측면이나 심리적, 영적인 요구가 간과되기 마련이다. 인간의 노화마저도 질병으로 간주되면서 죽기 전까지 모두가 치료받다가 병원에서 죽게 되는 것을 '죽음의 의료화'라고 부른다. 3. 의료인들의 정체성 혼란 현대사회에서 병원이 보편적인 죽음의 장소가 되면서 의료인들의 정체성 혼란은 더욱 더 심화되고 있다. 죽음을 의학적 사건으로 다루게 되면서 그 결과 무조건적인 연명의료가 시행될 때 혼란은 죄책감으로 돌아오게 된다. 특히 1999년 당시의 관행에 따라 집에서의 죽음을 위해 중한 환자를 집으로 퇴원시켰던 보라매병원 의료진에게 살인방조죄가 선고되면서 이제 의료진과 환자 측 사이엔 불신의 골이 깊어졌다. 그로 인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소송이 발생될 우려 속에 ‘방어진료’로써 연명의료가 늘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환자의 심장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지만, 환자를 살리거나 호전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없었다. 그렇다고 보호자들이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잘 이별할 수 있게 돕는다는 목적이 뚜렷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거지? 혹시 보호자들이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하여 환자의 심장박동을 유지하면서 임종을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그때 우리는 어서 보호자들이 지치기를, 그래서 그만하자 선언하고 환자의 죽음을 둘러싼 각종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후배 간호사가 "다른 사람이 보면 지금의 우리, 참 재수 없을 것 같아요. 그쵸?" 했을 때, 나도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김형숙의 회고대로 생명을 살리는 신성한 의료 행위가 재수 없는 책임 회피가 되는 상황은 의료인들에게 혼란을 넘어 자기 비하로 이어지게 된다. 그럴수록 의료인들은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입력된 매뉴얼대로 행동하고 원칙을 강조하는 기계로 몰아가게 된다.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배웠던 연민과 공감은 매우 위험한 역량이 되었고, 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치하는 것이 영특한 업무 역량으로 평가된다. 결국 연명의료를 받던 환자가 임종에 이르게 되면 인간적 애도는 건너뛰고 공장에서 물건을 처리하듯 죽음은 처리된다. 그렇게 한 인생이 삶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담당 레지던트의 사망 선언이 있고 사후 처치를 하는 시간이다. 평소대로 보호자들을 모두 내보내고 환자 상태를 말끔히 정리한 후에 다시 면회시켜야 했다. 모든 장치와 관들을 제거하면 말끔해진 환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호자들에게 잠시 보여주고 신속히 장례식장에 연락을 한다. 가족들이 중환자실에서 애도할 시간을 주어야 했지만 그 시간은 짧을수록 좋았다. 다른 환자들이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도록, 혹은 의료진이 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때로는 대기 중인 다음 환자를 위하여 환자가 떠난 침대는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정리한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가 평소 임종 환자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신속하게 죽음을 처리하면 큰 보호자와 긴장감의 끈을 두고 눈치싸움을 벌이던 큰 숙제 하나가 사라진 듯한 후련함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그냥 잠시일 뿐이다. 이후에는 점점 인간성을 잃고 황폐해져 가는 것 같은 자신을 마주하게 되고 혼란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게 의료인들을 짓누르게 된다. 4. 혼란은 무력감과 분노로 야마자키 후미오(山崎文雄)는 일본의 내과의사로 무의미하게 시행했던 연명의료와 심폐소생술 후 자신에게 남는 알 수 없는 무력감을 경험을 저서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病院で死ぬということ)’에서 구체적으로 다룬다. “임종 장면은 흡사 전쟁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싸움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싸움에서 진 후에 나는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늘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환자의 가족들에게 패배를 선언해왔다. ‘저희들은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가족들은 말한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환자가 병원 뒷문으로 통해 돌아간 뒤 나는 그때마다 또 하나의 일이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늘 뭐라 말할 수 없는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마음은 전혀 충족되지 않았다. 늘 무언가를 남겨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바쁜 일상 속에서 어느덧 잊히고 만다. 그리고 또 다른 환자의 임종을 볼 때면 다시 똑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똑같은 일이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 나의 이런 감정은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상대에게 싸움을 걸어야만 하는 사람의 숙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젊은 의사 시절에는 눈 앞에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것이 의사의 거룩한 사명이자 숭고한 열정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삶을 다 정리하고 평온하고자 했던 말기암 환자마저도 한 순간 심폐소생술의 대상이 되는 순간 스스로 의사가 아니라 의학의 힘을 과시하려는 풋내기 삼류 배우와 같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모습은 마침 그때까지 무대에 올라갈 순서를 기다리던 연극배우가 마침내 자신이 활약할 수 있는 장면을 맞닥뜨린 것과도 비슷했다. 마침내 호흡이 멈추고 심장이 정지하려고 하자 내내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의사들이 ‘드디어 나설 때군’ 하고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의사들은 환자와 가족들에게 가장 엄숙하고 가장 인간적이어야 할 마지막 이별의 장에 마침내 자기 순서가 되어 잔뜩 고무된 삼류 연극배우처럼 의기양양하게 등장해서 가장 소중해야 할 시간의 태반을, 어떤 의미에서는 잔혹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 소생술로 빼앗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고통없이 존엄하게 삶을 마감했어야 할 환자에게 ‘의학적 최선’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연명의료는 의학이 아닌 폭력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의학적 최선을 했음에도 그 현장은 전혀 존엄하지도, 영예롭지도 않으며 오히려 비참하고 끔찍한 상황으로 그에게 기억되었다. “환자의 입에서는 기관 튜브가 천장을 향해 튀어나와 있었다. 입술에는 삽관할 때 잇몸이 다쳐 나온 피가 묻어 있었다. 그로 인해 겨우 20분 전에는 평온했던 환자의 얼굴이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인생처럼 조용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 환자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폭풍에 휩싸인 돛단배처럼 의사들에게 실컷 농락당한 뒤 죽음을 맞았다.” 무의미한 연명의료로 인해 혼란을 넘어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상황은 비단 서양의 의료인도 동일하게 겪는 일이다.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의 내과 교수인 안젤로 볼란데스(Angelo Volandes)는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해야 하는 이야기들(The Conversation: A Revolutionary Plan for End-of-Life Care)’에서 이렇게 자신의 과거를 반성한다. “의사로서 나는 불필요하게 죽음의 과정을 연장한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고통과 해를 끼쳤던 사실은 나의 사랑하는 이들의 존재의 유한성이나 언젠가 마주하게 될 나 자신의 죽음을 직시할 때면 무척이나 나를 불안하게 한다. 초창기에는 젊은 의사로서의 나의 의학적 훈련과 경험들이 도리어 인생에 있어서 죽음의 역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 했다. 그러나 점차 나는 의사로서 부인할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하게 됐다. 의사에게 환자란, 어떻게 죽으면 안 되는지를 배우는 존재이다.” 5. 죽음 불안과 의료인의 자존감 한국은 1950년대 한국전쟁으로 전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이후 발전된 서구사회를 따라잡기 위한 정부 주도의 경제발전계획이 시행되었고, 그 결과 전 국토가 도시로 바뀌는 대변환을 겪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국민 90%가 도시에서 사는 ‘극단적인 도시화’를 이루었고 과거의 마을 단위 공동체는 사라지게 되었다. 나아가 가족들도 이제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모두 떨어져 살게 되면서 고령화에 따른 노인돌봄 문제는 큰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였다. 생계와 자녀 양육으로 부모를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 노인들은 결국 안전과 보호라는 명목으로 노인의료 복지시설로 옮겨진다. 2006년 전국에 900여 개였던 노인의료 복지시설은 2022년 6000여 개까지 급증했고,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며 이렇게 요양원, 요양병원은 한국인의 마지막 집이 되었다. 영국의 노년내과 의사 데이비드 재럿(David Jarrett)은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33 33 Meditations On Death)’에서 노화로 신체-정신 기능이 쇠퇴하면 시설로 옮겨 지내다 결국은 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거쳐 죽는 것을 현대사회의 ‘최빈도 죽음’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렇게 죽음과 죽어가는 환자를 마주하는 의료인의 피할 수 없는 일상이 되었고 그들은 반복해서 혼란과 무력감에 겪으며 괴로워하게 된다. 인간이 죽음 앞에서 혼란과 무력감을 겪게 되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을 설명한 일명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 TMT)’은 인간이 자신의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공포(terror)를 어떻게 다루고 관리하는지에 초점을 맞춘 심리학 이론이다. 미국 심리학자 제프 그린버그(Jeff Greenberg), 셸던 솔로몬(Sheldon Solomon), 톰 피츠코프(Tom Pyszczynski)에 의해 1980년대 후반에 제안되었는데, 이 이론의 핵심은 인간은 생존하려는 본능과 함께, 자신의 존재가 유한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데 있다. 연구자들은 실존주의 철학에 뿌리를 둔 그들의 이론을 ‘슬픈 불멸주의자(The worm at the core)’로 편찬하였는데,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이 “죽음 자각(mortality salience)”이 우리에게 엄청난 잠재적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더 높은 자존감을 추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항하여 자존감을 추구하는 방식은 크게 두 단계이다. 첫 번째는 자신이 속해 있는 문화적 세계관 즉, 공동체, 종교, 국가 등이 우월하다고 옳다라고 더 강하게 확신하는 것이다. 이는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존재가 어떤 형태로든지 그 속에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그 문화적 가치 기준에 따라 자신이 가치 있고 유능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다. 자신이 확신하는 문화적 세계관의 훌륭한 구성원이 되었을 때 집단과 자신이 일체감을 이루면서 죽음 불안이 완화되는 것이다. 이를 의료인에게 대입하면 의료인들이 왜 치료행위에 집착하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죽어가는 환자와 죽음이라는 사건은 의료인을 무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죽음이라는 사건의 불안이 그들에게 전이된다. 환자를 통해 자극되는 죽음 불안을 환자와 편안한 대화를 어렵게 하고, 대면조차 불편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저항으로 의료인이 속해 있는 문화적 세계관 즉. 첨단과학이 이끄는 현대의학의 가능성에 더더욱 매달리게 되고, 첨단치료의 정점에는 중환자실에서의 연명의료가 놓여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연명의료 행위의 결과는 결국 막을 수 없는 환자의 죽음으로 결말짓게 되어 의료인에게는 자존감보다는 무력감이 남은 실패가 반복되고, 그럴수록 죽어가는 환자는 기피의 대상이 되고 만다. 6. 의과대학 죽음교육의 주제는? 독일의 의사 미하엘 데 리더(Michael de Ridder)는 저서 ‘우리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How We Want to Die: Lessons from the Dying for the Living)’에서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살아오면서 자신이 시행했던 수많은 의학적 처치들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독일에서도 연명의료로 인한 사회 논란이 커졌던 시기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2008년 세브란스병원 김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연명의료 중단을 가능케 하는 연명의료 결정법 제정하였는데, 당시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사회적 대화 없이 전문가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통해 법의 초안을 마련했다. 반면 미하엘 데 리더에 따르면 독일의 경우에는 비슷한 법안을 만들 당시 무려 6년에 걸쳐 대국민 토론을 진행하였고, 그는 이 과정을 통해 독일인들은 '죽어감과 죽음에 대한 사회적 추방과 금기'를 깰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생의 마지막까지도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요구, 자기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담당 의사와 대화하라는 요구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의료인은 병원에서 매일 죽음을 일상처럼 겪게 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누구나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이 삶에 있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존중받을 수 있고 존엄하게 완성될 수 있는지 배운 바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가는 환자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오로지 우리가 가장 익숙한 의학적 처치만을 퍼부을 뿐 다른 대안을 고민하지 못한다. 하지만 환자에게 쏟는 우리의 노력은 결국 죽음 앞에 실패로 끝나게 된다. 죽음 앞에서 의료인은 무력감과 죄책감이 아닌 진정한 보람과 자존감을 쌓을 수는 없는 것일까? 미하엘 델 리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학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막아야 할 것은 때 이른 죽음,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죽음, 고통스럽고 끔찍한 죽음이나 너무 질질 끌면서 다가오는 죽음이다. 만일 환자가 의사들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죽어간다면 그거야말로 의학의 실패일 것이다.” 그는 죽어가는 환자에게 우리가 제공해야 할 의학은 고통스럽지 않게 하는 것, 끔찍한 상태로 마무리되지 않게 지켜주는 것, 그리고 너무 질질 끌며 고통과 비참함을 키우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병원에서 의사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환자가 그렇게 죽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의학의 실패라고 단언한다. 그러한 의료가 과연 대한민국 병원에서 가능한 것일까? 그동안 의과대학에서 시행하는 죽음과 관련된 교육들은 연명의료제도의 소개라든가, 그와 관련된 윤리적 이슈, 호스피스완화의학에 대한 개괄 등에 머물러 있었을 뿐 죽음을 대하는 의료인들의 정체성 혼란과 그로 인한 무력감과 자존감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를 못했다. 본 글에서는 김형숙, 야마자키 후미오, 미하엘 데 리더 등의 의료인들의 체험적 글을 통해 죽어가는 환자를 돌볼 때 의료인들이 정서적 소진과 혼란을 겪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죽음을 마주하면서 의료인이 무력감을 자존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느냐는 새로운 과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글에서 어떤 죽음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소개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최소한 의과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죽음 교육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는 실무적 내용이 아니라 의료인이기 전에 죽음 불안을 느끼는 실존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처럼 방어적 의료 행위에 집착하고, 기계적으로 환자의 죽음을 처리하면서 반복되는 정체성의 혼란과 무력감을 누적하게 될 것이다. 이는 국민 대다수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 하는 현실에서 그 대다수가 모두 인간적 죽음이 아닌 의학적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겪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읽을 거리 김형숙.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뜨인돌. 2017 야마자키 후미오.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잇북. 2011 미하엘 데 리더. 우리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학고재. 2011 셀던 솔로몬, 제프 그린버그, 톰 피진스키. 슬픈 불멸주의자. 흐름출판. 2016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될 때. 흐름출판. 2016 안젤로 볼란데스.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해야 하는 이야기들. 청년의사. 2016 데이비드 재럿.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 윌북. 2020 박중철.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홍익출판미디어그룹. 2022 볼 거리 [다큐]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1,2,3부 EBS 다큐프라임. (https://www.youtube.com/@EBSDocumentary) [다큐] 어떻게 죽을 것인가. 1,2부. 늘봄미디어 (https://www.youtube.com/@neulbommedia)
1.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흔히 죽음은 두려움과 부정적 감정을 동반하는 현상으로 여겨져 왔다. 이런 점에서 “좋은 죽음”이라는 표현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의료에서 말하는 좋은 죽음이란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과정 속에서도 환자의 의견과 가치가 존중되고, 불필요한 고통과 가족의 부담이 최소화되며, 의학적·윤리적으로 적절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좋은 죽음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평안함뿐 아니라,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기준에서도 적절성을 충족하는 포괄적인 이상이다. 그동안 “존엄사”, “품위 있는 죽음”, “웰다잉” 등의 용어가 사용되어 왔지만, 좋은 죽음은 단순히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더 넓은 맥락에서 개인과 사회가 죽음을 인식하고 준비하는 방식을 포함한다. 의료와 윤리의 관점에서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종결이 아니라 삶 전체의 질과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현상이다. 따라서 좋은 죽음은 죽음을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과정을 인간적으로, 그리고 의미 있게 마무리하려는 적극적이고 성숙한 태도라 할 수 있다. 2. 의료에서 좋은 죽음이 왜 중요한가? 의학의 발전으로 평균수명이 늘고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의료 현장은 삶의 끝자락을 함께하는 주요한 공간이 되었다. 2022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망자의 약 75%가 병원 등 의료기관에서 임종을 맞이하였고, 자택에서 사망한 경우는 16% 정도에 불과했다. 특히 65~84세 연령층에서는 80% 이상이 의료기관에서 생을 마칠 만큼 현대인의 죽음은 의료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죽음의 질은 국제적으로 높지 않은 평가를 받아왔다. 2010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가 발표한 ‘죽음의 질’ 지수에서 한국은 평가 대상 40개국 중 32위를 기록했으며, 이와 같은 낮은 순위의 주된 이유로는 의료인의 교육 부족과 국가 차원의 말기 관리 전략 부재 등이 지적되었다. 이는 국내 의료체계가 환자의 생명 연장에 주력한 나머지, 죽음의 질을 향상시키는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미흡했음을 시사한다. 다행히 2018년부터 연명의료결정법 시행과 호스피스 확대 등으로 일부 지표가 개선되고 있으나, 환자의 자기결정 존중, 통증 완화, 임종 환경 측면에서는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크다는 의견이 많다. 의료의 궁극적 목표는 환자의 건강과 안녕을 지키는 것이며, 여기에는 삶의 마지막을 편안하고 품위 있게 맞이하도록 돕는 일도 포함된다. 임종 과정에서 과도한 의료 개입으로 환자의 고통이 오히려 가중된다면, 이는 의료 본연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이다. 예컨대 충분히 관리할 수 있는 통증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거나 치료의 효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의미한 연명의료가 지속돼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고립된 채 생을 마친다면, 이는 명백한 “나쁜 죽음”이다. 따라서 좋은 죽음의 실현 여부는 의료의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이며, 환자와 가족의 만족도, 의료인의 직업적 보람, 사회적 신뢰와도 직결되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특히 암이나 만성질환과 같이 일정 기간을 거쳐 사망에 이르는 경우(전체 사망의 50~70%)에는 남은 삶의 질과 죽음의 경험을 향상시키는 것이 의료의 필수적인 책무로 인식되고 있다. 결국 좋은 죽음이란 환자의 존엄과 삶의 질을 보호하는 것이며, 인간중심의 의료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좋은 죽음에 대한 이해와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은 오늘날 의료인에게 필수적인 능력으로 간주된다. 3. 좋은 죽음을 의과대학생과 의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유 대부분의 의사는 진료 과정에서 여러 차례 환자의 임종을 맞닥뜨리게 되므로 좋은 죽음에 대한 이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과거에는 가족과 지역사회에서 임종을 맞는 경우가 많았으나, 현재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따라서 임종 과정에서 환자와 가족을 돌보고 의사결정을 도와주는 역할이 의료인에게 크게 요구된다. 의과대학생과 의사는 진단과 치료 방법뿐 아니라 삶의 마무리를 돕는 돌봄과 소통 방법까지 익혀야 환자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의료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다. 특히 말기 환자에게 적절한 돌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환자는 극심한 신체적 고통과 불안, 외로움 등을 겪게 되고, 가족 또한 심리적 상처를 입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의료인에 대한 불신이나 의료 소송과 같은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좋은 죽음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의사는 환자와 가족의 신뢰를 얻고, 자신의 전문성에 대한 보람과 윤리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을 계기로 임종기 환자 관리와 관련한 의료인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촉발된 바 있다. 당시 환자는 두부 손상으로 수술을 받은 후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며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환자의 가족이 강력히 퇴원을 요구하여 결국 퇴원한 직후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담당 의료진이 살인 방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의료 현장에서는 가족이 연명의료 중단을 요청하는 상황에 대해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게 되었고, 환자와 죽음에 대해 개방적으로 논의하는 문화 역시 오랫동안 위축되었다. 이는 의료인 교육에서도 임종기 돌봄과 윤리에 관한 체계적 훈련이 부족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그러나 2008년 발생한 ‘김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이제는 의료인들도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할 것과 해야 할 일을 제대로 교육받아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 특히 2018년 시행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은 환자의 자기결정에 따라 연명의료를 거부할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어, 의료인에게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보다 엄중한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역량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4. 좋은 죽음의 주요 구성 요소 좋은 죽음은 다양한 측면의 충족을 요구하는 다차원적 개념이다. 학계와 임상 현장에서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좋은 죽음의 주요한 구성 요소는 다음과 같다. 신체적 안위: 통증과 증상이 적절히 조절되어, 불필요한 침습적 처치 없이 편안한 상태로 임종을 맞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적·심리적 안정: 두려움, 불안,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을 줄이고, 심리적으로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수용과 남은 시간에 대한 의미 부여, 마음의 평화를 포함한다. 사회적 관계의 충족: 임종 전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갈등을 해소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경험은 중요한 좋은 죽음의 요소다. 특히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 환자와 일반인들이 꼽는 가장 중요한 좋은 죽음의 조건 중 하나다. 영적 평안과 삶의 의미: 자신의 삶이 의미 있었음을 받아들이고, 종교적 혹은 내면적인 평화를 얻는 것이다. 이는 신앙 여부와 무관하게 환자가 인생을 되돌아보고 성취와 가치를 인정하는 과정도 포함한다. 남은 과업의 마무리: 유언 작성, 재산 정리, 미뤄온 일의 완수, 전하고 싶은 말의 전달 등 임종 전 현실적인 준비를 의미한다. 이는 환자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가족의 부담도 줄여준다. 의료적 특성: 환자가 원치 않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도록 하고, 지속적이고 따뜻한 돌봄이 제공되어야 한다. 의료진은 환자를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환자의 의견에 부합하는 의료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또한 의료인 스스로 죽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준비가 있어야 적절한 돌봄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크게 개인적 요소(신체적, 정신적, 영적 안녕), 관계적 요소(사회적 관계와 삶의 완성), 환경적 요소(죽음 준비와 의료 체계)로 분류할 수 있다. 좋은 죽음을 위해서는 이 모든 측면에서의 조화가 필요하지만, 각 요소의 중요도는 환자의 가치관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쁜 죽음’의 조건을 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극심한 통증의 방치, 혼자 외롭게 임종을 맞는 상황, 환자의 의견과 무관한 과도한 치료, 준비 없는 갑작스러운 죽음 등은 피해야 할 부정적 요소들이다. 궁극적으로 좋은 죽음이란 이러한 부정적 상황을 배제하고, 앞서 열거한 긍정적 요소들이 가능한 한 최대한 충족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5. 문화권에 따른 좋은 죽음의 정의와 접근 방식의 차이 좋은 죽음의 개념은 문화와 사회적 가치로부터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나라나 문화권에 따라 그 강조점에 차이가 존재한다. 예컨대 서구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율성과 고통 경감을 중시하는 전통이 강하다. 미국이나 유럽의 말기환자들은 통증 없는 상태로 편안히 죽는 것, 그리고 종교적으로 평화로운 상태에 이르는 것을 좋은 죽음의 중요한 요소로 꼽는 경향이 있다. 실제 연구에서 서구 환자들은 “통증 조절”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그 다음으로 “신과의 평화”, “가족과 함께 있는 것” 등을 들었다는 보고가 있다. 또한 “삶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다”거나 “의식이 흐려지지 않고 맑은 상태로 마지막을 맞고 싶다”는 희망을 표현한 사례도 많다. 이는 개인적 요소를 중시하는 문화적 경향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가족과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 가족과 함께 하는 것 등 관계적 요소의 우선순위가 높게 나타난다. 국내 설문조사에서도 일반인과 환자들은 “가족에게 부담 주지 않기”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를 좋은 죽음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또한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일의 정리, 재정 문제 해결 등 현실적인 준비 역시 중시된다. 의료인의 관점에서도 문화적 차이를 보이는데, 한국 의료인은 환자를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의료체계, 불필요한 기계적 치료에 의존하지 않는 것 등을 강조한 반면, 서구 의료인은 환자의 자기결정 존중과 통증 관리 등 증상관리의 표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차이는 관계 중심의 집단주의 성향과 자율 중심의 개인주의 성향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임종과 관련한 논의를 가족이 주도하고, 환자에게 관련 정보를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 또한 자신의 치료 결정을 의사나 가족에게 위임하는 태도를 보이곤 한다. 이는 자율성을 중시하는 서구 문화와는 다른 접근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환자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법적·윤리적 기반이 강화되고 있으며, 서구에서도 가족의 역할을 중시하는 완화의료 접근이 확산되는 등 양측의 접근방식은 점차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결국 좋은 죽음에는 보편적 요소가 존재하지만 그 우선 순위와 실천 방식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의료인은 특히 다문화적 배경을 가진 환자나 외국인 환자를 돌볼 때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인식하고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6. 좋은 죽음과 관련된 바람직한 소통 좋은 죽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환자, 가족, 의료인 간의 효과적인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다. 소통을 통해 환자의 욕구와 가치관을 파악하고, 상호 신뢰와 지지를 형성함으로써 좋은 죽음의 구성 요소들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환자-의료인 간의 소통이다. 의사는 정기적인 대화를 통해 환자의 신체 상태뿐 아니라 정서 상태와 삶의 우선순위를 이해하게 되고, 환자 역시 자신의 병과 예후를 정확히 알게 되어 남은 삶을 계획할 수 있다. 이러한 치료적 동맹이 형성되면 환자의 불안과 고통이 줄고, 삶의 질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특히 ‘나쁜 소식’을 전하는 대화는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어려운 과정이지만, 좋은 죽음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단계이다. 환자의 상태와 예후에 대해 정직하게 알리는 것은 환자가 현실을 수용하고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과정이다. 이를 위한 대표적인 소통 전략이 SPIKES 모델이다. 이 모델은 다음의 6단계로 구성된다. Setting – 대화를 위한 적절한 환경을 조성한다. Perception –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Invitation – 환자가 알고자 하는 정보의 범위와 깊이를 파악한다. Knowledge – 환자의 상태에 대해 명확하고 현실적으로 설명한다. Empathy – 환자의 감정 반응에 공감하고 지지적 태도로 대응한다. Strategy/Summary – 향후 치료나 돌봄 계획을 함께 논의하고 요약한다. 이러한 구조화된 접근을 활용하면, 의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핵심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환자의 정서적 요구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다. 실제로 SPIKES 교육을 받은 의사와 의과대학생들은 나쁜 소식을 전달하는 데 더 큰 자신감을 느꼈다고 보고한 바 있다. 다만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이기보다는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자율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와 공감적 지지를 함께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환자-가족 간 소통 역시 좋은 죽음 실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의사는 가족과의 면담을 통해 환자가 말하지 못한 내면의 두려움이나 진심을 파악하고 중재할 수 있다. 또한 가족의 정서적 부담을 살펴 적절한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가족이 환자를 끝까지 돌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의사는 정보 제공뿐 아니라, 가족이 환자와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며,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동시에 현실적인 준비도 함께 할 수 있도록 조언자이자 협력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결국 좋은 죽음을 위한 모든 소통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뢰 형성에 있다. 환자와 가족이 의사를 신뢰해야만 진솔한 감정과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고, 의사도 이를 바탕으로 적절한 돌봄을 제공할 수 있다. 의사는 솔직하면서도 민감한 방식으로 대화를 이끌어야 하며,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돕겠다”거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와 같은 말은 환자에게 큰 위안과 신뢰를 준다. 특히 공감의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의사가 환자와 가족의 감정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를 전할 때, 신뢰가 높아지고 환자의 임종기 스트레스도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의과대학과 수련 과정에서는 진정성 있는 경청, 공감 능력, 나쁜 소식 전달 기술 등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이러한 소통 역량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 좋은 죽음을 실현하기 위한 핵심 임상 능력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7. 좋은 죽음에 대한 윤리적 접근 좋은 죽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윤리적 판단과 결정이 필요하며 환자, 가족, 의료인 모두에게 바람직한 태도가 요구된다. 그 출발점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데 있다. 환자는 자신의 상태와 예후를 정확히 알 권리가 있으며 치료 방향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권한을 가진다. 따라서 의료인은 환자에게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 일부 가족은 환자가 충격을 받을까 염려해 병명을 숨겨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가족과 의사 간의 공모는 환자를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비윤리적 행위로 간주된다. 물론 환자의 수용 능력을 고려해 정보를 단계적으로 제공하는 접근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하고 명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스스로 삶을 계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환자에 따라 치료 결정을 가족에게 맡기고 싶어 하거나 결정을 미루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그러한 태도가 진정한 환자의 의지인지 아니면 두려움이나 우울로 인한 회피인지 파악하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다. 반복적인 면담을 통해 환자의 내면을 확인하고 실제로는 결정을 원하지만 망설이고 있다면 이를 도와야 한다. 반대로 환자가 진심으로 가족에게 결정을 위임하길 바란다면 그 뜻을 존중하되 환자의 가치가 반영되도록 가족과 충분히 상의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모든 당사자가 수용 가능한 최선의 결정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최근 강조되는 “함께하는 의사결정(공유의사결정, shared decision-making)”의 핵심이다. 환자, 가족, 의료인이 충분히 대화하고 숙고하여 내린 결정만이 죄책감이나 후회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죽음을 위한 윤리적 준비의 하나로 사전돌봄계획 수립이 권장된다. 이는 향후 의사결정이 불가능한 상태에 대비하여 환자가 원하는 치료 방향과 원하지 않는 처치를 문서로 남겨두는 것이다. 이를 통해 환자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고 일정 부분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다. 사전계획에는 심폐소생술 여부, 인공호흡기 적용 여부, 중단하고 싶은 치료(예: 항암치료 중단)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의료인은 상태 악화 시 예상되는 시나리오와 선택지를 설명하고 환자가 자신의 가치에 맞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환자가 의식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 대리 의사결정자를 미리 지정하도록 권고할 수도 있는데 이때 대리인은 환자의 삶의 목표와 가치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 임종 과정에서 흔히 직면하는 윤리적 딜레마 중 하나는 연명의료결정과 관련된 문제이다. 좋은 죽음의 관점에서 환자가 원하지 않는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지속해 고통을 연장하는 일은 지양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관련 법률에 따라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자신의 의사나 가족의 합의로 연명의료를 중단하거나 유보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이는 환자의 존엄성과 최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일부에서는 연명의료 중단을 “소극적 안락사”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명의료 중단은 환자가 원하지 않는 치료를 거부하는 행위로 죽음을 의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락사와 구별된다. 안락사는 죽음을 적극적으로 앞당기는 행위이며 생명을 단축시키는 목적을 가진다. 반면 연명의료 중단은 이미 임박한 죽음의 과정을 인위적으로 연장하지 않을 뿐이며 그 의도는 고통 완화와 환자의 뜻 존중에 있다. 이러한 의도의 차이는 윤리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환자가 연명의료를 거부하더라도 이는 정당한 결정이 될 수 있다. 다만 연명의료 중단이나 유보 의사를 밝힌 환자가 충분히 숙고했는지, 결정 능력이 온전한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극심한 고통이나 우울로 인한 충동적 판단은 아닌지 면밀히 살피고 필요한 경우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결국 좋은 죽음의 윤리란 환자의 존엄성과 의지를 존중하면서도 무의미한 의료로 인한 나쁜 죽음을 피하게 돕는 균형을 가리킨다. 이는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의사는 전문 지식뿐 아니라 윤리적 통찰과 공감을 바탕으로 이 어려운 상황을 이끌어가야 한다. 8. 좋은 죽음 관련 교육 커리큘럼 및 프로그램 구성 방안 의과대학생과 전공의를 대상으로 한 좋은 죽음과 임종 돌봄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의 필요성에 대해 최근 의학교육계 전반에서 공감대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다행히 국내 의과대학에서도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완화의료 및 임종돌봄 교육을 점차 도입하고 있는 추세다. 2019년 조사에 따르면, 국내 41개 의과대학 중 66%가 말기 환자 돌봄과 관련된 정규 교과과정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대학들도 일부 과목 내에서 관련 내용을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정규 교과과정에 나쁜 소식 전하기나 통증 및 증상 조절과 같은 핵심 주제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전체 교육 시수는 평균 10시간 내외로 상당히 부족했고, 학교 간 교육 편차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완화의료 교육 내용의 충실도를 평가하는 지표인 PEAT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총 83개 항목 중 평균 11개 항목만 충족되어 교육 내용이 대체로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진의 78%는 현재의 교육 수준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응답했으며, 학생들이 실제 임상 현장에서 임종 환자 돌봄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평가한 교수는 단 7%에 불과했다. 이러한 현실은 단순한 교육적 아쉬움을 넘어 좋은 죽음에 대한 교육의 강화가 얼마나 절실한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좋은 죽음 관련 교육 커리큘럼을 내실 있게 구성하기 위해서는 지식 전달, 태도 함양, 기술 훈련의 세 가지 축이 균형 있게 포함되어야 한다. 지식 측면에서는 좋은 죽음의 철학과 역사, 윤리적 쟁점(자기결정권, 연명의료 중단 등), 법적 제도(연명의료결정법, 죽음 관련 법규), 완화의료의 기본 원칙 등을 다룰 수 있다. 또한 통증, 호흡곤란, 의식상태 변화 등 말기 증상 관리에 대한 의학적 지식도 필수적이다. 태도 측면에서는 죽음에 대한 의료인의 인식 전환과 환자와 가족에 대한 공감 능력 개발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죽음을 주제로 한 성찰적 글쓰기, 윤리적 딜레마 토론, 호스피스 현장 견학, 시한부 환자와의 만남 등의 프로그램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학생들이 자신의 죽음관을 성찰하고 환자의 입장을 상상해보는 죽음 교육을 통해 보다 인간적인 의료관을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기술 측면에서는 의사소통과 의사결정 지원 기술의 훈련이 핵심이다. 예를 들어 표준화 환자를 활용하여 나쁜 소식 전하기 면담을 연습하고, SPIKES 모델에 따라 피드백을 받는 교육이 효과적일 것이다. 또한 가상 시나리오를 통해 연명의료 관련 가족 회의, 호스피스 진료 계획 수립, 임종 단계별 돌봄 지시 등 현실에서 마주칠 상황을 연습할 수 있다. 이러한 실습 위주의 교육은 학생들이 실제 임상에서 당황하지 않고 표준화된 절차와 문구를 활용하면서도 환자 개개인에 맞춘 대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더 나아가 전공의나 현직 의사를 위한 연수교육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병원 단위에서 완화의료팀의 주도로 정기 워크숍을 열어 최신 지견과 사례를 공유하고, 의료기관윤리위원회와 연계하여 어려운 사례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팀 접근 교육도 중요한데 좋은 죽음의 실현을 위해서는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사회복지사, 종교인 등이 함께 협력해야 하므로 다직종간 의사소통과 역할 이해를 돕는 팀 훈련 프로그램이 권장된다. 마지막으로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정서적 지원과 롤모델의 역할도 중요하다. 학생과 전공의가 임종 환자를 돌보며 겪는 스트레스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하며, 경험 많은 선배 의사가 환자와 가족을 대하는 모습을 통해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실질적인 배움이 될 수 있다. 또한 평가와 피드백을 통해 교육과정을 지속적으로 보완하고, 학생과 전공의들이 좋은 죽음에 대해 긍정적이고 진지한 태도를 갖도록 격려하는 문화 형성도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좋은 죽음에 대한 교육은 의사의 전문성에 인간적인 깊이를 더해주는 과정이다. 의과대학생과 의사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놓인 환자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배우고 훈련받을 때 비로소 우리 의료는 환자의 생애 전 주기에 걸쳐 신뢰받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죽음은 더 이상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라 의료현장에서 구현해야 할 현실적 과제이며, 이를 위한 교육과 임상적 실천은 의료의 궁극적 목적을 완성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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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공동체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이다.” - 장 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 Case 1 A병원 응급실에 방문한 B는 담관암 말기이다. 그녀는 1년 전 암 진단 시 수술적 치료를 받고 완치의 희망을 품은 지 6개월 만에 암이 재발했고, 이어지는 항암 화학치료 및 스텐트 시술 등을 견디며 투병했지만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 화학요법을 포기하고 지난주 입원 후 수일 만에 자의 퇴원했다. 자의 퇴원 후 집에서 민간요법을 검토하며 견딘 지 십 수일 만에 소변이 잘 나오지 않고 황달이 심해지는 증상으로 응급실을 찾았다. 주치의 C는 추가적 시술 및 치료 재개, 투석 고려 등을 권고하였으나 B는 더 이상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아 그런 치료들을 거절했다. 그러자 설득을 멈춘 주치의는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그렇다면 자신이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호스피스를 담당하는 다른 병원으로 전원 가시는 것이 좋겠다고 설명하고 전공의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자리를 떠났다. B씨는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지시를 받은 전공의는 이미 분주하게 전원 조치를 진행하고 있었다.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B는 자신의 환자 신분과 그에 대한 의료 체계의 대응이 무언가 이전과 다르게 분류 및 진행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최종 국면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모종의 방식을 기대하며 그동안 치료받았던 병원을 찾았으나, 실망과 낙담 그리고 거절감을 느껴야 했다. Case 2 D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 E는 의식이 돌아오고 있지 않다. E는 뇌출혈로 입원하여 병실 치료받는 중 병발한 폐렴에 심각한 호흡부전증후군으로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전실 되었고 기관 삽관 및 기계호흡을 적용받는 중이나 상태가 계속 악화 중이다. E의 아들 보호자 F는 기다리던 중환자실 회진시간에 주치의로부터 유감스러운 말씀이지만 현재 치료를 유지하는 것 이외에 “더 이상 해줄 것이 별로 없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F는 아버지 E와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며 의료진에게 의식을 깨워줄 수 있냐고 문의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주치의가 다음 회진을 위해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뒷모습을 보며 F는 그럼 이제 정말 아무것도 못하면서 기다려야 하는 거냐는 포기에 가까운 질문을 가까스로 삼켰다. 주치의의 뒤를 따르고 있는 전공의 G는 F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고 평소 돌보던 환자 E의 보호자라 안면이 있는 사이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G는 다음 회진을 향해 주치의를 앞서가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위에 등장하는 가상의 사례 Case 1과 Case 2는 다소 비극적 서사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종합병원 및 대학병원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예시이기도 하다. 아울러 보기에 따라서는 의학적 치료계획이나 국내 의료전달체계의 역량 분배적 관점으로 볼 때 합리적인 관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례들이 어딘가 불편하고 석연치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서, 의미 있는 대상의 죽음과 그 상실에 따른 반응을 애도(哀悼, condolences)라고 정의해 본다면 위의 사례에서는 죽음의 의미 및 그 반응으로서의 애도의 공명共鳴이 그 공통의 지평에서 일정부분 어긋나 있는 까닭은 아닐까?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우리가 ‘애도’ 라고 부르는 것은 일견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감정으로 추단되지만 한편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인류가 각기 다른 문화 속에서 여러 모양으로 상례를 발전시켜온 오랜 역사를 상고할 때 보편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실상 그러한 보편성이 이 논의의 출발점이가도 하다.) 이에 대한 정치(精緻)한 논의는 이 글에서 다루는 논의를 넘어서는 것일 테니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그 보편성을 타인의 애도에 대응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 정도로 일견 정의해 볼 수 있다면, 적어도 앞서의 사례에서 죽음이라는 단절과 상실을 마주 대하며 인격적으로 대응하여 타인과 공명할 적절한 기회가 주치의에게도, 환자에게도, 가족에게도, 전공의에게도 찾아오지 않았다. 주치의 C는 환자를 위해 고민해 온 치료 계획이 환자 본인에 의해 중단되어 석연치 않았고, 환자 B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거절감을 경험했으며, 보호자 F는 고통스러운 무기력에 빠져 있었고, 전공의 G는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에 이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모두가 피해자가 된 것 같은 이런 상황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죽음에 대한 의학적 사유가, 생존에 대한 논의에 비해 생의학과 의료사회에 빈곤한 것은 차치하고, 의미 있는 대상의 죽음과 상실이 모종의 반응으로 실체화하여 나타나기까지 일체의 과정이 누락되었다. 주치의도, 환자도, 보호자도, 전공의도 각자가 생각하는 죽음, 그 상실에 대한 관점을 일련의 공통된 의미 기반에서 공명시키지 못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가장 근원적인 요소는 죽음과 상실에 대해 관계된 각자가 서로 공명하고 소통할 정도로 충분한—브루노 라투어(Bruno Latour)의 표현을 빌자면—common trading zone, 즉 공동의 지평으로서 ‘반응’ 구간이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오늘 말하고자 한 주제, 즉 ‘의미 있는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애도’의 부재다. ** 사무엘 베체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작품 전체를 가득 채우는 문제의식의 존재(存在)가 고도 라는 인물의 전적인 부재(不在)였던 것처럼, 우리는 때로 우리 삶에서 문제가 되는 것들의 중심에,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무엇이 부재하고 있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검토의 예시라고 하기에는 사안을 둘러싼 문제가 단순하지 않지만 필자가 다음 장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해석 역시 모종의 논의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불과 수년 전에도 이러한 류의 부재를 총체적이고 압도적으로 경험했으나 제대로 복기하지 못한 까닭이다. 다음 장에서 이에 대하여 논한다. 2. COVID-19 팬데믹,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11 2020년 발행된 필자의 졸고, 죽음과 애도에 대한 고찰과 교육 가능성 탐색: 죽음 교육에 앞서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애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Korean Medical Education Review 2020; 22(3): 163-172) 의 내용을 일부 수정 및 수록하였다. 2021년 COVID-19의 진격은 동시대의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인간들 거의 모두를 잠재적 환자의 범주로 규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고갔다. 그것은 동시에, 주지하듯 그 모두가 서로를 잠재적 감염원으로 간주해야 했었다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였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리적인 거리로만 표상되지 않았다. 소위 관련 분야의 전문가 집단이라는 의사들에게도 두려움은 예외없이 찾아 왔다. 임상 진료지침은 수주 단위로 update 되고 있었고 전지구적인 의학 저널이 오직 COVID-19의 방역과 치료에만 매달려 연구성과들을 토해내고 있었지만 불안감은 여전했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 들고 있었고 감염격리 중증병상, 소위 코로나 중환자실은 늘 자리가 모자랐으며, 무엇보다 환자들이 예측할 수 없이 순식간에 악화되는데 비해 의료진 입장에서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염병의 창궐. 때는 바야흐로 COVID-19의 Delta 변이가 일어나면서 감염력과 치명률이 동시에 높아지는 이른바 팬데믹의 절정기였다. “마스크 이전의 세상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는 음울한 예언이 사회 전반에 떠돌았고 병원에서도 늘어난 감염자에 이어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는 시기였다. 굳이 여러 원인을 논의하지 않더라도 감염자가 늘어나면 일정 비율로 중환자가 있기 때문에 사망자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감염의 두려움을 넘어서기 위해 고안되었으나 전방위적인 두려움 그 자체를 너무 잘 이미지화하여 보여주는 방호복. 소위 Level D는 전쟁에 나가가는 병사가 착용하는 갑주와도 같았다. 그러나 주지하듯 방어력에 방점을 두어 설계한 갑옷은 기동성이 떨어진다. 예컨대 그 갑옷은 착용 및 탈의의 시간만 30분이 걸렸다. 게다가 탈부착의 순서가 바이러스의 감염을 최소화하도록 고안되어 있었기에 계속 모종의 경로를 생각하면서 옷을 입고 벗어야 했는데 이 순서가 하나라도 틀리는 날에는 감염 확률이 증가할 수 있으리라는 강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 사정은 환자들 및 보호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작동하는 압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같지 않았다. COVID-19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들에게는 보통 감염의 전파 가능성과 중증도의 급격한 악화 가능성이 전제된다. 그들의 신체는 그래서 감염병 대응 본부의 원칙과 돌보는 의료진의 전략에 대해 상당 부분 의존적인 상황에 놓이곤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향과 원칙이 어떠하든 COVID-19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의 주된 의사 결정은 의학적 소생의 가능성과 감염 격리의 원칙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들의, 삶의 주권에 대한 이해가 널리 진작될 가능성은 애초에 크지 않았다. -의료진의 숫자가 충분한 병원이란 내가 알기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 의료진은 이 감염된 신체들에 대하여 최대한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동선을 짜고 일련의 매뉴얼을 개발하는데 골몰해야만 했다. 이는 기존의 의료 관행에서 바라보면 분명 의료 외적인 요구였지만 전술했듯, 생존과 감염격리라고 하는 프레임이 다른 모든 가치들을 상회하는 시점에서 이미 의료 내부의 문제였다. 새롭게 COVID-19 중환자실로 환자가 입원하면 보통 초기 대응이 끝나고, 대기하고 있던 보호자를 만나야 하는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원격 화상 면회를 허용하는 것으로 대응 메뉴얼이 구성되었지만 이 시스템의 구축은 보통 급조된 것이었고 제대로 구축되었다고 해도 충분하지 않다. 조그만 화면에서 보이는 입원 환자의 실루엣은 어둡고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기에 보호자들은 주로 이 주치의와의 면담 시간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의문을 해소해야만 했다. 게다가 보호자들은 순수하게 지적인 의문만을 가지고 의료진을 만나러 오지는 않는다. 이런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들은 COVID-19의 전염이 왜 하필 자신의 남편, 아내, 아버지, 어머니 - 때로는 자녀 -를 덮쳤는지를 의문시하다가 이윽고 뭐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을 전달할 때면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도 빈번했다. 그런 현장에서는 의료진도 가족들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회상컨대, 그 무거운 공기를 제대로 예시할 방법이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일견 보호자 입장에서 가장 마음이 어려운 지점은, 기존의 다른 병증과 다르게 이 전대미문의 감염병에서는 악화되고 있는 가족의 안위를 본인이 직접 보고 만지고 듣고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생사의 고비를 넘고 있는 가족이 지척에 있는데,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봉해 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물론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족' 이란, 생각할 때마다 애틋한 마음을 느끼게 되는, 수혜와 시혜가 교환된 오랜 역사로 정의되는 그런 관계로 일반화되지 않는다. 몇 십년간 만나지 않는 사이에 법적인 근거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고 수소문해도 연락조차 받지 않는 보호자도 있다. 이렇게 살아가기 난맥한 시대에, 소위 정상적인 가족이란 삶의 기본을 제대로 보장해 주지 않는 사회에서 또 다른 책임과 규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다. COVID-19 중환자실에 입원환 환자가 생사의 기로에서 헤맬 때, 유일한 친인척이라서 어쩔 수 없이 소환된 생면부지의 조카와 면담을 할 때에도, 다시는 자신에게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관계의 절연을 재차 선언하는 보호자와 통화할 때에도, 고령의 환자에게 찾아온 불의의 손님을 한숨으로 묵묵히 받아들이지만 마음이 타들어가는 배우자의 주름잡힌 얼굴을 마주 대할 때, 혹은 제발 저희 아버지(어머니)를 살려달라며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싶다고 애원하는 자녀들을 만날 때에도 공통적으로 COVID-19 팬데믹의 격리 상황하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마땅히 일어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문제 하나가 누락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모든 이에게 그 죽어감을 곁에서 바라보는 모든 이가 가질 수 있는 근원적인 감각의 부재다. 그것은 죽어가는 이와 남겨진 자가 시간이 허락하는 한 최후까지 이어지며 서로 나눌 수 있는 공명의 기회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 결핍은 비단 죽어가는 이와, 그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가족이나 배우자 등의 당사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생명의 죽음을 마주 대하는 모든 방위에서 모든 사람들, 모든 다른 생명들에게 이러한 존중의 부재는 다양하고 심각한 파급 효과를 일으킨다고 생각해 왔다. 의료진의 입장에서 이런 예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갑작스런 증세 악화로 한 환자가 의료진의 각종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갖 의학적 술기와 투약 효과의 대상이자 검사 결과 하나 하나의 해석에 의해 치료가 섬세하게 달라지던 신체는 온데 간데 없고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는, 아무 반응 없는 몸이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이다. 생명과 죽음의 이분법이 근대 의료의 근간을 이루어 왔음을 감안할 때, 의료진이 생명을 살리고자 죽음과 싸웠던 전방위적 피로도가 극심할 수록 죽음 너머에는 쓸 수 있는 에너지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동시에 최선을 다했다 할지라도 의료진은 이러한 수고를 암묵적인 패배로 간주할 가능성이 높다. 아마 이런 패배가 수없이 반복되는 COVID-19 중환자실이라면 때로 무감각해지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는 길이라 여길 법하다. 생명-죽음의 이분법은 이런 방식으로 정당성을 다시 획득하고 의료진은 이러한 이분법에 불가피하게 동조함으로써 한편 계속 상처받게 되는 것이다.[1] 결국 이렇게 되면 ‘어떻게든 생존하게 만드는’ 방식과 더불어 ‘죽는 순간까지 좋은 삶을 유지하는 (그래서 결국 잘 죽어가는)’ 방식이 공존할 수 있는 지점이 결국 증발한다. 아울러 COVID-19로 사망하신 분들의 유해는 영안실을 거쳐 3-5일 간의 장례를 치른 뒤 화장이나 매장 등을 위해 장지로 이동하는 일반적인 경로를 따르지 않고 바로 일률적인 화장(火葬)을 진행한 이후에 상례가 진행되는 역순을 취했다. 혹시라도 있을 사후 감염의 가능성을 원천차단22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에볼라 바이러스의 발병이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이어진 이유 중 하나가 당시 일부 지역에서 의례적으로 행했던 장례 풍습 – 죽은 이에게 입맞추는 – 을 통한 사후감염이었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치명률이 높지만 전염력이 강하지는 않은데 망자의 유해에 오래 생존하는 편으로 사후 감염이 가능하기에 그러한 장례 풍습을 통해 전파력의 범위가 커졌던 것이다. COVID-19 의 경우 사후감염의 가능성은 고려되었지만 실제 감염자가 보고되지는 않았다. 하고자 하는 감염병대응본부의 지침을 따른 것이었지만, 난 아직도 이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인간 의례의 무엇인가가 치명적으로 손상 받았다는 감각을 지울 수가 없다. 병원 측에서는 매뉴얼에 따라 임종 시 유가족을 가능한 짧게 입회한 뒤 COVID-19라는 진단명이 적힌 사망 진단서에 의거하여 유해를 신속히 화장장으로 이송하는 형국을 취했다. 얼마전까지 살과 피를 가지고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던 한 인격이, 불과 한줌의 재로 변하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유가족은 물론 다른 이들의 방문이나 애도로부터 망자의 유해는 완벽하게 소외되는 것이다. ** 이제 COVID-19 시대의 죽음 전반을 통틀어 죽어간 이와 남겨진 이 사이에서 어떤 것이 통째로 생략되었는지에 대해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인지하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나는 그것을, 앞장의 논의를 그대로 가져와 '애도(哀悼, condolences)’의 결락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3. 죽음과 애도에 관하여33 이 장에서는 2024년 발행된 필자의 졸고, 그 시절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공저, ‘달라붙는 감정들’ 중 필자의 참여 부분) 의 내용을 일부 발췌 및 수정하여 수록하였다. 죽음은 좁은 의미로는 현대에 이르러 각종 병증에 의해 신체의 활동이 정지하게 될 때 병원에서 맞이하고 의사 및 의료인의 손에서 판정이 나는, 단순히 삶의 종료 지점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에 서 보면 인류에게 피해갈 수 없는 운명으로서 삶을 규정하고 위치 짓는 결정적 심급이기도 하다. 예컨대, 프로이트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실존 심리학의 관점으로 발전시킨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죽음 앞에서 인간들이 보이는 보편적인 태도에 주목하였고 인간이 죽음에 어떻게 저 항하고 대응하는지 깊이 연구하였다. 베커는 그의 걸출한 저작 “죽음의 부정”에서 인간은 무의식 안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계속 간직하고 있으며, 이를 억누르거나 무시하기 위해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한 다양한 작업을 끊임없이 수행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곧 삶의 동력이 되는 셈이며, 이러한 영웅주의적 행동양식으로 점철된 삶은 죽음의 공포를 망각하기 위한 절차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절차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발동되는 심리 기제가 ‘나르시즘’과 ‘전이’이다. “(...) 신이 자기편이라는 확신은 가젤보다 사자가 더 크게 느낄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차원에서 유 기체는 삶의 경험에서 자신을 확장하고 영속화하려 함으로써 스스로의 나약함에 적극적으로 맞선 다. 움츠러들기보다는 더 많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가지씩 수행한다. 이렇게 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신중하게 무시하거나 생명 확장과정에 실제로 흡수할 수 있다.” - 어니스트 베커, [죽음의 부정] – 위의 인용문 에서처럼 베커에 따르면 나르시즘은 자신의 유약함에 대응하며 삶의 저변을 확장시켜 나가는 동시에 죽음의 부정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기제가 된다. 한편, ‘전이’란 나르시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을 때 시전된다. 이에 대해서는 베커를 원용하여, 죽음을 대하는 현대 의학의 문제에 적용시킨 박중철 교수의 견해가 적확하리라 생각하여 옮긴다. 자신의 유한한 피조물 성을 체현한 인간은 이로 인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이’라는 방어기제로 자신보다 우월한 권력이 나 절대성에 스스로를 동일시하거나 예속시켜 다시 나르시즘적 안정감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전이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착각을 유발하며 (...) 맹목적인 전이에는 자신보다 더 큰 권력의 원천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자 하는 욕망이 깔려 있고 이것들은 국가, 혈통, 조국, 민족과 같은 신비 와 집단주의를 조장하기도 한다. 박중철 교수는 나르시즘과 전이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방식을 죽음을 대하는 현대 의학의 태도에 적용시켜 비판을 시도한다. 나르시즘은 자신의 능력을 자존감의 근거로 삼는 것이고, 전이는 집단이나 문화에 자신을 예속시켜 동일시하는 것인데, 이러한 일이 죽음 앞에 선 현대 생의학의 입지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현대 의학은 첨단과학이라는 기술적 ‘나르시즘’에 의존해 왔으며, 결국 극복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설 때는 법률, 원칙주의, 치료지침이라는 도그마적 권위 안으로 자신을 ‘전이’시켜 자존감을 지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명의료 포기 법 안에 자의로 서명하여 현대 의학적 치료의 지침을 벗어난 환자들은 더 이상 의학의 주된 고려대상이 아니며, 그것은 의학의 무기력함이 아니라 환자 자신의 법률적 결정이기에 의학적 권위와 자존감은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는 식이다. 의사들이 현대 의학적 전이에 빙의하여 치료지침에 따라 무리한 연명의료를 강행하거나 혹은 치료 포기 후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을 상실감 없이 마주 대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이유가 이러한 논점에서 설명 가능해진다.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대하는 반응으로서 애도의 부재 또한 설명될 가능성이 열린다. 즉 전이라는 착각 속에서 도그마적 권위에 예속된 의학과 의료진의 입장은 죽음을 슬퍼하거나 제대로 반응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슬퍼하거나 반응하는 순간 죽음 앞에 무기력한 자신을 바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현대 의학의 맥락에서 의료진의 입장이 아니라 환자 및 보호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이는 죽음의 문제는 어떠할까? “죽음의 부정”의 서문을 썼던 샘 킨(Sam Kean)은 어니스트 베커와 동시대 를 살았던 죽음의 전문가이자 ‘기묘한 동맹’으로 Elizabeth Kübler-Ross를 지명한다. 그녀는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는 의사로 이름이 높았지만, 죽음을 몸소 체현하는 과정을 저술한 환자로서도 이름이 알려진 바 있다. 의과대학에서 환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도식처럼 배우는 ‘부정 분노-타협-우울-수용’의 5단계가 그녀 연구의 산물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이 도식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그녀 자신이 강조한 바 있다. 그녀는 상실을 ‘수업’이라고 부르며 죽음을 ‘완성’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고 죽어가는 이를 돌보는 일에 있어 서 큰 반향을 만들어냈고, 죽음을 비롯해 수많은 상실에도 삶은 지속된다는 것을 남겨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 시대에 시작되었던 호스피스 운동이 의료사회 및 의학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류의 문화로 편입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동시대에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는 첨단 의학기술과 죽음을 정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공포가 경합하여 만들어 낸 결과의 반영일 것이다. 요컨대 죽음의 패러다임은 바뀌지 않은 셈이다. 또한 퀴블러-로스의 저작은 그녀 자신이 말년에 죽어가는 환자로서 수기를 작성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전문가로서의 조언 같은 성격이 강하다. 예컨대 “인생 수업”이라는 그녀의 저작에서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라고 쓰거나 ‘죽음이 궁극적인 상실은 아니다’라는 언명을 통해 죽음이 라는 상실로부터 회복 가능성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의료현장에서 죽어가는 환자와 보호자의 입 장에서 이러한 이야기는 사안이 어느 정도 지난 다음에나 귀담아들을 만한 제언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의료현장의 생의학적 시간은 그 바깥의 일상적 시간과 사뭇 다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인류학자이자 예술가인 아부 파먼(Abou Farman)은 그의 아내가 유방암 판정 및 치료를 받다가 재발한 후 마침내 생의학적 가망이 없는 시기인 ‘terminality’로 분류되고 있는 것에 대해 자아성찰적인 민족지를 기술한다. 무엇보다 파먼의 문제의식은 인간이라는 입체적 존재가 죽음을 앞두고 생의학적 체계 안에서 임시적인 시간 단위인 ‘terminal’로 축소되는 것에 향해 있다. 인간의 죽음은 본래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비해 생의학적 카테고리로서 임종기 환자라는 분류는 단지 일시적인 시간성에 불과하기에 환자의 인간 존재는 압축 당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이자 학자이나 엄마이자 작가가 아니라, 단지 삶이 3개월 남은 사람이 되는 식이다. 파먼은 terminality라는 생의학적 기획이 ‘모든 것을 계수, 계량화하여 평가하는 수량적 사회에서 죽어가는 과정을 사회화하기 위한 수량적 방식’이라고 비평하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ars moriendi)’라는 중세 기독교식 질문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자조한다. 이렇게 보면 퀴블러-로스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낙관했던 ‘시간’ 중 필연적이고 아마도 가장 고통스러운 일부는 생의학적 재단에 의해 폭력적인 존재 압축의 방편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렇게 축소된 존재를 향해 전인격적인 반응인 ‘애도’가 적실하게 발생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비단 COVID-19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생의학적 시스템 내에서 애도의 결락은 행위자인 의사나 환자의 문제라기보다 다분히 ‘구조적’인 문제가 된다. 한편, 퀴블러-로스는 그녀의 다른 책 “상실 수업”에서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슬픔’을 내적인 영역이자 감정으로, ‘애도’를 외적인 영역이자 관습으로 구획하는데, 실상 이러한 구획은 감정과 의례를 구태의연하게 분리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물론 의례로서의 애도는 나름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기능을 가진다. Kaufman과 Morgan 은 “삶의 시작과 끝의 인류학”이라는 논문에서 죽음에 대한 그간의 인류학적 현지조사와 기획을 정리한 바 있다. 그들은 최근의 인류학적 기술(ethnography)이 산 자와 죽은 자의 핵심적 관계에 주목한다며, 죽은 자들의 배치(disposition)와 기념(memorialization)이 살아있는 자들의 사회적 정체성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기에 인류학은 연구 초기부터 죽음과 사별의식, 즉 애도를 연구해 왔다고 밝힌다. 예컨대 ‘죽음의 인류학을 재고 (revisit)’하고자 기획해 온 Matthew Engelke는 그의 최근 논문에서 인류학자 David Graeber가 1995년 현지 조사한 Merina족 매장의례인 ‘Famadihanas’를 환기하는데, 이 의례에서 산 자들은 죽은 자의 시신과 애도의 춤을 추며 매장준비를 한다. 죽은 자는 명예롭게 호명되고 산 자들은 축복을 구하며 춤을 추는데, 이때 춤사위는 실상 죽은 자와 산 자의 연결(connection)인 동시에, 시신을 비인격화하여 매장을 위해 싸매며 산 자로부터 단절(detachment)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처럼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는 애도의례를 통해 재구성되며, 의미 있는 존재의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무질서가 기념되고 재배치되며 다시 사회질서 안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한편,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의례의 동력과 과업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레베카 루이스 카터(Rebecca Louise Carter)는 미국에서 살인율이 가장 높은 도시 뉴올리언스에서 총격으로 사망하거나 다친 아이들을 둔 흑인 어머니들이 기독교의 기치 아래에 서로를 위로하고 모임을 가지며 공동의 모성으로 연대하는 현장을 탐사한다.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카터는 이러한 흑인 어머니들의 움직임을 ‘애도’의 관점에서 재평가한다. 죽은 자녀의 생일파티를 열어주는 것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작업은 죽은 자를 대신해서 산 자가 자신과 타인의 공동작업을 진행하는 애도의 행위가 되며, 이것은 죽은 자가 산 자의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한 가지 방식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폭력적 관행 및 지배권력 구조에 미묘한 균열을 내는 사회적 수 행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애도의 형태가 상당히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음과 더불어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의 의례로서의 애도가 여전히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을 고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수많은 삶과 죽음이 횡행하는 의료현장에서 우리가 던져볼 만한 질문은 이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좋은 애도’ 란 무엇인가? 실상 이 질문은 필연적으로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을 조정할 수 없는 경우에도 애도의 방식과 내용은 조정할 수 있다. 우리가 죽음 자체를 막을 수는 없더라도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을 수정할 수는 있으며, 죽어가는 이를 살려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반응하는 방식은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시점에서의 의제를 ‘애도의 윤리’ 라고 호명하고자 한다. 의료사회 내 세세한 규칙과 지침조차 일련의 의무이자 윤리로 받아들이는 의료계의 관행은 차치하더라도, 최종 심급으로서 인간의 죽음에 당면한 반응인 ‘애도’에 대해 일련의 윤리적 감각을 부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도와 멜랑콜리”라는 유명한 저작에서 프로이트는 정상적인 애도와 비정상적인 멜랑콜리를 구분하면서 의미 대상을 상실 후 고통을 겪는 주체가 그 대상에게 투여되었던 리비도를 회수하여 자아로 되돌리는 작업이 완수될 때 정상적인 ‘애도’이며, 상실한 대상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리비도를 철회하지 못하는 병리적 과정이 ‘멜랑콜리’라고 천명한 바 있다. 이는 정상적인 애도과정인 ‘내재화’와 비정상적인 과정을 말하는 ‘합일화’를 주창한 니콜라스 아브라함(Nicolas Abraham) 과 마리아 토록(Maria Török)에 의해 계승되었고 정신의학 교과서에도 소개된다. 반면,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애도의 불가능성을 말하며, 진정한 애도란 ‘끝나지 않는 것’이라고 언명한다. 이는 프로이트 학파 논의의 근간에 대한, 정중한 이의 제기에 해당한다. 프로이트나 아브라함/토록이 말하는 정상적인 애도가 데리다에게는 의미 대상을 타자로 고립시켜 주체로부터 영원히 추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죽음이 프로이트에게는 타자를 잊는 시작인데 반해, 데리다에게는 타자를 기억하는 시작점인 탓이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애도는 대상의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만남은 보통 ‘예측할 수 없는 작별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기에 애도는 실상 만남이 시작되는 순간에 함께 시작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친구였던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추모강연에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 죽어가는 타인의 죽음은, ‘책임이 있는 나’라는 나의 정체성 자체 속에서 내게 영향을 미치며 형언할 수 없는 책임을 이룬다. 그것이 바로 그의 죽음과 맺는 나의 관계이다.” 물론 환자를 치료하고자 했던 프로이트의 관점과 철학적, 윤리적 사유를 중점으로 두었던 데리다의 입장 차이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주고받는 대화의 형식으로 보는 편이 생산적 논의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텐도 아라타(Tendo Arata)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을 읽어보면, 주인공 시즈토는 전국을 유랑하면서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애도하며 다니는 별난 인물이다. 그는 다른 조건은 상관없이 망자가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에게 사랑받았으며 누가 그에게 감사했는가만을 조사하여 그 내용으로 애도를 행한다. 그런데 이 소설이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단지 그의 별난 행위가 주는 여운만이 아니다. “애도 예찬”의 작가 왕은철에 의하면 시즈토의 애도는 그의 주변 인물에 대해 ‘감염성과 중독성’ 이 있다. 그의 평가를 잠시 옮겨 보면 이렇다. “놀라운 것은 시즈토의 애도에 감염성과 중독성이 있다는 데 있다. 독자의 관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기사를 꾸며내고 사건을 조작하는 걸 서슴치 않던 저널리스트 마키노 고타로, 복잡한 과정을 통해 남편의 다소 변태적 요구에 따라 남편을 죽여준 나기 유키요, 그리고 아들이 애도를 그만 두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기를 바라면서도 그를 멀리서 지켜봐 주는 사카스끼 준코에 이르기까지, 결국에는 모두가 시즈토처럼 타인을 소중하 게 생각하고 타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렇게 따뜻한 애도에 대한 상상력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인류역사에는 애도라고 차마 부르기 어려운 애도의 형태가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인류학자 낸시 쉐퍼-휴즈(Nancy Schepper-Hughes)는 영아 사망률이 20%에 육박했던 브라질 북부에서 행한 그녀의 연구를 묶어 낸 “Death without weeping: the violence of everyday life in Brazil”이라는 저서에서 정치-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에 놓인 어머니들이 약하게 태어난 자신의 아이들의 죽음을 방조할 뿐 아니라 상징적으로 미화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이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이가 죽어가는 상황에 대해 (약한 아이는) 일찍 죽는 것이 축복이라고 하기도 하며 아이에게 삶의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않은 것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기도 한다. 적어도 이 아이들의 장례식에는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방식의 애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애도는 이런 형태로 사회적 환경 과 상황에 따라 경사(傾斜)되거나 심지어 폭력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애도에 있어서도 사회적 조건과 맥락이 중요해지며, 전술하였던 ‘애도의 윤리’가 요청되는 것도 지극히 당위적인 사안이 된다. 어찌 보면 죽음에 대한 이해는 ‘죽어본 일이 없는’ 산 자들에게 실제적으로 난망한 작업 이다. 의료인들이 생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시도하는 지적인 이해가 일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이의 정동과 윤리적인 지점의 이해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요컨대 애도 반응으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에 대한 이해는, 전술했다시피 전(全)인격적인 작업인 까닭이다. 사회학자 김홍중 교수는 ‘우리의 마음이 서로 공명하는 체험 속에서 우리가 어렵사리 하나의 사회를 기획하고 계약하고 꿈꾸고 체험한다’고 했다. 그는 아울러 우리 시대의 공동체를 향해 부재나 결손 혹은 비관과 진실하게 대 면하면서 고통과 맞서고, 새로운 희망을 모색하는 고뇌의 ‘공통공간’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앞서 COVID-19 팬데믹 시절에 우리 사회가 죽어간 이들과 남겨진 이들 사이에서 놓쳤던 근원적인 감각과 경험을 다소 회집會集 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죽음을 맞닥뜨린 의료현장에서 의료진과 환자, 보호자 등 각 관계자들이 슬픔이나 고통, 대안과 의견을 소통하는 데 있어 공통의 토대가 되는 이해와 정서가 필요하다는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애도’는 모두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체현 될 수 있는 것이기에, 함께 공유하는 이해 수준의 공통 기반에 근간을 형성하는 경험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이 공통의 기반은 의료인이나 비의료인 할 것 없이 사회구성원들이 평소 경험해 온 애도의 질적, 양적 수준에 따라 변화하고 공명하며, 모종의 소통을 거쳐 개인과 공동체에 사회적 경험으로 축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정답은 없기 때문에 ‘애도’ 또한 주입식으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애도’는 죽음에 대해 공명하는 공통의 이해 기반을 반영하고 있기에 죽음 자체보다 논의하기 수월하고, 전술한 바와 같이 윤리적 함의를 지니고 있으며 교육적 논의를 통해 향후 수준을 논하는 일이 가능하다. 요컨대 학생부터 노년까지 좋은 죽음에 대한 공론의 기회가 주어지고, 대학과 병원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에서도 연구와 논의의 장이 활발히 열리는 일이 애도 반응의 저변을 넓히고 의료환경에서 도처에 산재한 죽음에 대해서도 능동적이고 포괄적으로 대처하는 방안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전술했던 ‘애도의 윤리’ 또한 다학제적으로 재점화될 가능성이 열린다. 4. 나가며 자크 라캉은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 ‘햄릿’을 분석하면서 햄릿 왕자의 분노와 비극의 원천으로 ‘비정상적으로 단축된 애도’를 지명한 바 있다. 왕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원흉이던 그의 삼촌과 그의 어머니를 포함, 그를 제외한 모두가 도외시하는 왕궁에서 그가 느낀 분노와 좌절은 요컨대, 적실한 애도의 시간이 사회적으로 증발/상실된 사회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비극적 정동의 표현이라는 의미이다. 이를 사회 내 개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적실한 애도의 필요로 현시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전술했던 것처럼 COVID-19 팬데믹과 같은 현장에서 집합적으로 증발한 애도는, 어떤 불의의 기회에 더 파괴적인 사회적 고통이나 분노로 나타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죽음과 의례를 연구한 사회학자 로베르 에르츠는 죽음과 애도의 관계를 사회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고찰한다. “(…)원시 부족은 죽음을 자연현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죽음은 영적인 세력이 행하는 것으로 가령 고인이 어떤 금기를 위반해 자신에게 재앙을 가져왔거나 적이 주술적 의례로 그를 해하는 형식으로 발생한다. 민족지학자들은 이러한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고 알려주면서도 정작 그 믿음을 사라지기 힘든 심각한 오류로만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믿음이, 그 사회의 영구적인 필요를 순진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실제로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영속성을 전달한다. 사회는 그 자체가 불멸이라고 느끼고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 구성원들이 죽을 운명임을 전파하지 않는다. (…) 따라서 사람이 죽을 때 사회는 구성원 한 명만 잃는 것이 아니다. 사회는 자기 삶의 원리와 자기 신념에 타격을 입는다. 누군가의 임종 시 친인척과 사람들이 그 주변에 촘촘하게 모여 비명을 지르는 것은 마치 전체 공동체가 길을 잃었다고 느끼거나 아니면 적어도 다른 세력이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동체가 보이는 반응과도 같다.” - 로베르 에르츠, [죽음과 이중 장례식]44 단행본, [죽음과 오른손] (문학동네, 박정호 역, 2021) 에 수록된 ‘죽음과 이중장례식’ 내용을 일부 옮기고 원서의 내용을 참고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기위해 축약 및 의역했음을 밝혀둔다. – 이는 다시 말해 인류가 오랫동안 견지해온 입장에서, 사회 구성원인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애도는 사회의 존속에 불가결한, 자체적 필요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꼭 필요한 것만 진행해도 시간과 여력이 모자란 의료 현장에서 사회적인 괸점이란 보통 잉여에 지나지 않는다.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이 빠듯하게 자리잡은 의학교육의 커리큘럼 내에서 그리고 최근 의정갈등을 맞아 의학도 교육도 모르는 위정자들이 무도하게 헤집어 놓은 의학교육의 현장에서 죽음과 애도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가 얼마나 의미 있게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 어딘가에 가 닿을지 역시 확신이 부족해진다. 그러나 실제 세상에서 문제가 해결되는 방식은 상당 부분 사회적 특성들에 기반한다. 의사가 진단 후 약 처방을 할 때 그 약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약을 복용할 환자의 몸 그리고 그 약을 구입할 환자의 경제적 능력인 것처럼. 그러므로 때로 우리들은 무엇이 더 근본적이고 더 필수적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의학이 모든 죽음에 대해 승리할 수 없음이 전술한 바와 같이 자명하다면, 특히 의학교육에 있어, 죽음에 대한 애도의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참고문헌 1. Lee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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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은제란? ‘감은제’라는 말은 생소할 수 있지만, 한자로 풀어보면 ‘감사(感)’, ‘은혜(恩)’, 그리고 ‘제사(祭)’라는 뜻을 담고 있다. 즉,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추모제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는 매년 시신을 기증하신 분들을 기리는 감은제를 지낸다. 이는 기증자의 이타적 정신을 기억하고, 이를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인성을 갖춘 의사를 양성하는 교육 행사다.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감은제는 해부학 실습이 진행되는 4월 셋째 주 목요일 오후에 유가족분들을 모시고 의과대학장과 교직원, 학생들이 함께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다. 2. 해부학 실습을 위한 시신의 역사 해부학은 멀리 고대에 거슬러 그 역사를 찾을 수 있고, 의업에 종사하는 자는 입문단계에서 해부학을 공부하는 것을 당연시하였지만, 인체 해부 실습이 의학교육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림 1은 4세기쯤 로마의 카타콤에 그려진 벽화로 해부학 실습 교육 장면을 담고 있다. 교수님은 시체에서 멀리 떨어져 앉아 있고, 학생들을 시체에 손을 대고 있지 않고, 바닥에 뉘여진 시신을 긴 나무막대로 지적하며 공부하는 장면이 묘사된다.1)1) Ripoll, Gisela. (2023). RIPOLL, G., Anatomical Dissection. The Fourth-Century A.D. Scene in the Via Latina Catacomb / Via Dino Compagni Hypogeum (Rome), in M. JURKOVIĆ, E. SCIROCCO, A. TIMBERT, D. DI BONITO & J. BEHAIM (eds.), Repenser l’Histoire de l’art médiéval en 2023. Recueil d’études offertes à Xavier Barral i Altet, Dissertationes et Monographiae 19, International Research Centre for Late Antiquity and Middle Ages, University of Zagreb, 2023, 447-464 (DOI: 10.1484/M.DEM-EB.5.134957).. 10.1484/M.DEM-EB.5.134957. 그림1 해부 장면, 프레스코화 , Villa Latina Roma (작가 미상) 4세기경 그림 특히 원근법을 생각한다면 앞쪽에 있는 시신의 좀 더 크게 그려져야 할 것 같은데 작은 오브제로 보일 뿐이다. 존경하는 스승님의 그림이 가장 크게 그려져 있고 학생들이 주변에 모여 있다. 이 장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학생들에게 해부학 교육을 한 것이리라고 여겨지는 장면인데 고인에 대한 존중감은 느낄 수 없다. 실제로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의학 교육에서 해부는 그 필요성이 관념적인 수준에서 인정되었지만, 실질적인 교육과 임상 적용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림2 Dr. 니콜라스 툴프의 해부학 강의』 렘브란트의 1632년 캔버스 유화 작품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소장 고대부터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해부의 대상은 주로 사형당한 죄수들이었다. 해부는 교육적 목적뿐 아니라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렘브란트가 그린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란 그림을 보면, 해부된 시신은 당시 교수형 당한 무장 강도2)2) https://en.wikipedia.org/wiki/The_Anatomy_Lesson_of_Dr._Nicolaes_ Tulp?utm_source=chatgpt.com였다. 1632년 1월에 교수형에 처해진 후, 암스텔담 외과의사 길드에서 인도되어 해부된 것이다. 이 그림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의사 선생님들이 카데바 워크숍을 한 후에 찍은 인증샷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이렇게 사진을 인터넷이나 SNS 등에 올린다면 비윤리적 행위로 비난받을 뿐 아니라 의대생이 이런 행위를 한다면 퇴학과 같은 엄중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윤리적 가치와 판단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이 그림은 해부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1632년쯤 되면 의학 공부를 위해 인체를 해부하는 것이 용인되는 시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체 해부는 의학교육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해부극장’이 등장하면서 일반인들도 해부 과정을 직접 관찰하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기회를 얻었다. 실제로 해부극장 예매가 시작되면, 요즘말로 ‘광클’할 정도로 빠르게 매진되었다고 한다. 해부 실습실이나 해부극장 입구에는 종종 라틴어로 “Mortui vivos docent”—즉,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라는 경구가 새겨졌다. 이 문구는 이후 많은 해부학 실습실에서도 사용되었으며, 해부학 교육을 위해 더 많은 해부용 시신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해부학 실습에 사용된 카데바는 사형수뿐만 아니라 무연고 사망자, 그리고 공동묘지에서 허락 없이 훔쳐진 시신까지 포함되었다. 특히 1828년 영국에서는 한 대학 근처에서 여인숙을 운영하던 자가 살인을 저질러 해부용 시신을 공급하는 범죄를 저질렀고,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해부용 시신에 대한 윤리적·법률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당시의 해부용 시신은 단순한 학습 교재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해부학 교육에 사용되는 시신을 카데바(Cadaver)라 부르기 시작한 시기는 12세기 이후로 여겨진다. 이 단어는 라틴어 cadere(쓰러지다)에서 유래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죽은 몸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화했다. 고대 로마 시대에도 cadaver는 ‘죽은 몸’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3. 카데바에서 침묵의 스승으로 20세기 중반으로 진입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해부학 교육과 연구에 사용되는 시신을 자발적으로 기증하는 체계가 확립되기 시작한다. 기증자의 이타적 자기 결정에 대한 경의와 존중과, 그리고 카데바를 대하는 의료계의 태도 변화가 시작된다. 특히 1996년 대만의 자제(慈濟, Tzu Chi) 의과대학이 진행한 “Silent Mentor 프로그램”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프로그램은 시신 기증자를 단순한 해부 대상이 아닌 ‘침묵의 스승’으로 존중하며, 학생들이 기증자의 생애와 가족사를 이해하고 감사·추모 의식을 거쳐 해부 실습에 임하도록 구성된 교육 모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의대생들은 공감 능력과 윤리의식을 함양하고, 기증자의 죽음을 통해 생명 존중과 인간 중심의 의술을 배우게 된다.3)3) Santibañez S, Boudreaux D, Tseng GF, Konkel K. The Tzu Chi Silent Mentor Program: Application of Buddhist Ethics to Teach Student Physicians Empathy, Compassion, and Self-Sacrifice. J Relig Health. 2016 Oct;55(5):1483-94. doi: 10.1007/s10943-015-0110-x. PMID: 26311054.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은 이 변화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따랐다. 필자가 의학도로서 해부학 실습을 시작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1984년 의예과 2학년 2학기에 해부실습을 했다. 실습 전 해부학 교수님의 추모의 말씀과 함께 시신 중에는 기증하신 분도 한 분 있으니 예의를 갖출 것을 지시받고 해부를 조심스럽게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카데바는 무연고 시신이었다. 시립병원 등에 오랫동안 안치되었으나 유족이 연락되지 않은 분들을 의과대학장의 요청에 따라 각 의과대학에 배정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해부가 어느 정도 진행된 시신의 유가족이 나타나 모시고 가는 상황도 발생해서 어떤 실습조는 불가피하게 다른 조에 배정되기도 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가 안정되어 무연고 시신을 기반으로 한 해부학실습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도 실습용 시신(카데바) 부족으로 1994년/1995년 해부학실습을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도달하였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희생된 故이승영 님의 유가족들이 “죽으면 장기(臟器)를 기증하겠다”는 딸의 약속과 고인이 늘 가져온 박애정신을 기리며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故이승영 님의 시신을 기증해 주셨다.4)4)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4/10/19/KVYRJO5TSVBGTFAQDXSEFOYQRA/ 이 사건은 시신 기증 문화 정착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해부학교실 교수님들을 중심으로 시신 기증자를 위한 추모탑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고, 마취과 신정순 교수의 통 큰 기부 덕분에 빠른 속도로 사업이 진행되었다.5)5) 김애리. "신정순 평전: 첫 여성 마취과 의사의 잠들지 않는 삶." 서울: 청년의사, 2022. 추모탑의 명칭과 디자인을 공모하였는데, 디자인은 공모를 통해 김정 건축사의 작품이 선정되었으며 시공 과정까지 마무리를 해주셨다. 추모탑 명칭도 철학과 김충렬 교수님이 응모한 “감은탑”이 선정되었다. 탑문도 김충렬 교수가 써 주셨고, 1996년 11월 28일 첫 감은제를 치르게 되었다.6)6)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4125009?sid=102 4. 감은탑과 교육적 의미와 가치 감은탑은 안암병원에서 의과대학 본관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위치하며, 기증자들의 성함이 새겨진 화강암 판들이 쌓인 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세히 보면 두 개의 기둥이 나선형으로 돌면서 가운데 양손을 모아 기증자분들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하는 형상이 보일 것이다. 그림3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정에 설치된 감은탑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감은탑의 추모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 뭉클함을 느끼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해부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학생들에게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증자들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그들이 인술을 베푸는 따뜻한 의사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매년 감은제를 준비한다. 이 글에서는 감은탑의 내용을 독자들과 공유하며, "해부실습 과정에서 감은제가 어떤 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림4 감은탑문, 정확한 내용은 아래 부록 참고. "성스러운 유체는 가장 진실한 교재로 쓰여 의학적 지식을 정확히 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거룩한 유지는 산 교육으로 승화되어 인술 정서를 함양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감은탑의 이 글귀는 해부학 교육의 핵심을 요약한다. 시신 기증자의 몸은 단순히 해부 구조를 익히는 도구가 아닌 진실한 교재이며, 그 정신은 따뜻한 의술의 씨앗이 되어, 수많은 환자를 돌볼 인술로 이어진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다양한 추모 행위가 해부학 실습과 연계되어 이루어진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는 대면식 날 감은탑 참배를 하고, 탑문의 내용을 필사하고, 실습실에 기증자가 남긴 메시지를 보고, 유가족과 함께하는 감은제를 진행한다. 이를 통해 해부학을 포함한 의학교육의 숭고함을 배우고, 경외심과 책임감을 갖게 된다. 감은탑의 비문은 이러한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몸은 산화하였고, 이름만 남았다. 그러나 이들의 거룩한 유덕은 영원토록 살아갈 생명의 호신으로 영존하리라." 추모는 해부학 수업의 마무리가 아니라, 의료인으로 성장하는 첫걸음이다. 죽음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나 정보의 습득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 생명에 대한 겸손,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공감을 익히는 일이다. 감은탑 비문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가장 고귀한 것은 생명이다. 따라서 이 생명을 지켜주는 것보다 더 은혜로운 것은 없다. 이분들은 마지막 남은 몸마저 많은 생명들을 구하고자 바쳤으니, 이는 천지생물지심을 구현한 활인공덕이 아닐 수 없다." 의학은 죽음을 극복하는 학문이 아니라,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삶의 가치를 지키는 학문이다. 추모는 이러한 가치를 되새기는 출발점이다. 해부학 실습은 단순한 기술 습득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겸손과 인간에 대한 공감을 배우는 과정이다. 해부학 실습은 예비 의사로 생에 첫 환자를 마주하면서, 감은제를 통해 직업 전문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걷게 된다.7)7) Chang HJ, Kim HJ, Rhyu IJ, Lee YM, Uhm CS. Emotional experiences of medical students during cadaver dissection and the role of memorial ceremonies: a qualitative study. BMC Med Educ. 2018 Nov 12;18(1):255. doi: 10.1186/s12909-018-1358-0. PMID: 30419880; PMCID: PMC6233563.8) Hsu HC, Sung TC. Empathy and cultural humility: Caribbean medical students' experience in Taiwan's Silent Teacher family interviews. Anat Sci Educ. 2025 May 27. doi: 10.1002/ase.70050. Epub ahead of print. PMID: 40432166. 살아 있는 자는 죽은 자에게서 배우며, 그 배움은 우리를 더 나은 의사이자 더 나은 인간으로 이끈다. <부 록>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감은탑 전문 감은탑(感恩塔) 지명(誌銘) 이 탑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헌체하신 분들의 숭고한 박애정신과 이타행위를 기리고, 그 교육적 효능을 길이길이 이어가고자 새운 것이다. 성스러운 유체는 가장 진실한 교재로 쓰여 의학적 지식을 정확히 하는데 이바지했으며 거룩한 유지는 산 교육으로 승화되어 인술정서를 함양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가장 고귀한 것은 생명이다. 따라서 이 생명을 지켜주는 것보다 더 은혜로운 것은 없다. 이분들은 마지막 남은 몸마저 많은 생명들을 구하고자 바쳤으니 이는 천지생물지심을 구현한 활인공덕이 아닐 수 없다. 여기 탑앞에 서는 이들이여. 옷깃을 여미며 경건한 마음으로 탑돌에 새겨진 이름들을 보라! 몸은 산화하였고, 이름만 남았다. 그러나 이들의 거룩한 유덕은 영원토록 살아갈 생명의 호신으로 영존하리라. 1996년 5월 18일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건립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 - 톨스토이 - 1. 죽음의 의료화 인간은 태어나서 언젠가는 죽는다. 세상에 이것만큼 명확한 것은 없다. 최근에 의학이 발전하면서 질환에 의한 죽음이 의료화되면서 이제 죽음은 극복의 대상이며 의료의 실패를 의미하게 되었다. 의료기관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시설로 의료기관에서의 죽음은 의료의 실패이다. 많은 나라에서 보건의료의 지표로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의 감소를 목표로 삼으며 의료시설을 확대하고 의료인을 양성하고 있다. 그러나 치료중심의 의료서비스에서 증상관리와 완화의료가 보편화되면서 의료의 실패가 아닌 의료기관에서의 죽음도 확대되고 있다. 호주나 영국 등의 병원에서 환자가 사망한다면 먼저 질병의 경과상 ‘예측된 죽음(anticipated death)’인지 아니면 ‘예측되지 않은 죽음(not expected 또는unexpected)’인지를 구분한다. ‘예측된 죽음’이란 암이나 장기부전, 치매나 노화 등으로 질병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전신의 여러 기능이 나빠지며 의학적인 조치를 취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으며 죽음에 이르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예측되지 않은 죽음’은 의료시술이나 처치 중에 예방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초래된 죽음으로, 이러한 죽음의 발생에 대한 분석결과는 의료의 질 지표로 활용된다. 가정에서의 사망이 50% 이상이었던 1900년대 후반까지 죽음은 삶의 현장이고 영유의 공간이던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났으며, 이별의 과정인 장례절차까지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었다. 그러나 의료가 발전하고 핵가족화 되면서 2003년 이후로 병원사망이 가정사망을 앞서게 되었으나, 치료 중심의 의료환경에서 임종까지 연명의료를 시행하게 되며 사회적인 갈등이 유발되고 되고 있다. (1) 연명의료기술 인간의 수명연장에는 의학지식, 의료장비와 의약품, 처치기술 등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기여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의료를 목적에 따라 구분한다면, 다음과 같이 응급조치에서의 기본소생술과 전문소생술, 장기대체의료, 물과 영양공급, 질환조절치료로 분류할 수 있다. 심장과 폐의 기능이 멈춰진 경우에도 이를 되돌리기 위한 응급조치 중 기본소생술은 의료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시행할 수 있는 것으로, 심폐소생술인 가슴압박과 인공호흡 및 제세동기 사용이 있다. 전문소생술은 의료인이 의료기관에서 시행가능한 것으로 기도삽관과 인공호흡기사용, 승압제사용, 항부정맥제 등의 사용이 있다. 질환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과 영양공급은 스스로 마시거나 먹지 못하는 경우에는 급식관을 이용하여 환자의 코를 통해 위까지 연결을 하여 공급하거나, 배에서 위(stomach)로 연결구멍을 만들어 급식을 하기도 한다. 더욱이 주요장기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의료기기가 개발되어 생명연장에 기여하게 되었는데, 인간의 주요 장기의 기능을 기계로 대체하는 의료기기가 발전하며 콩팥의 노폐물 제거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혈액투석이나 자발호흡의 기능을 대체하는 인공호흡기, 폐에서의 산소교환의 외호흡과 산소를 체내로 운반하는 심장의 펌프기능을 대체하기 위한 체외막형산소화장치(Extracorporeal Membrane Oxygenation) 등을 사용하게 되어 단일 장기가 손상된 경우에 장기의 기능을 대체하게 되었다. (2) 질환조절의료와 완화의료 질환이 만성화 되면서 질환조절치료와 생명연장치료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고혈압약이나 당뇨약, 치매약 등은 목적이 완치가 아니라 질환의 진행속도를 늦춰 생명을 연장시키는 효과를 목적으로 한다. 수술, 항생제나 항암제 등은 질병을 치료하여 완치시키게 하기 위한 의료이나, 일부 암에서의 항암제나 방사선치료는 완치는 시키지 못하지만 질환의 진행을 늦추는 목적으로도 사용하여 이를 포괄적으로 질환조절치료(disease modifying)나 생명연장의료(life prolonging treatment)라고 한다. 2002년도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에서는 완화의료(palliative care)를 정의하며,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을 받아들이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질병치료나 생명연장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환자의 신체, 삼리사회적, 영적인 문제에 대해 고통을 줄이기 위한 치료를 완화의료(palliative care)라고 하는데, 완화의료에는 통증관리뿐 아니라 일부 질환조절치료가 포함되기도 한다. 이제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머지않아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이 가능할 것으로 예측하는 미래학자까지 나오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죽음은 필연적이다. 2.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 (1) 죽음의 과정 자연사의 과정은 수주에서 수개월에 걸쳐 서서히 나타난다. 그 죽음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사망 수주에서 수개월 전에는 활동량이 감소하고 음식섭취량이 줄며 피로가 증가한다. 사망 수일에서 수주전에는 의식이 혼란해지거나 착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며, 불안해하는 증상이 생기며, 수면과 각성 주기에 변화가 생긴다. 말이 줄고 잠이 늘어나게 된다. 혈압이 서서히 떨어지고 맥박이 불규칙해진다. 입맛이 없어지며 갈증을 느끼는게 줄어들어 음식 섭취가 줄어들고, 소변량이 줄게 된다. 사망이 임박하게 되는 마지막 2-3일 동안에는, 의식 수준이 떨어지게 되며 대부분 축 늘어져 있는데, 간혹 갑자기 움직이거나 말하거나 먹는 에너지 발현이 있기도 한다. 호흡이 불규칙 해지는데 무호흡을 하다가 갑자기 숨을 몰아 쉬는 현상이 반복된다. 목에 가래가 끓는 듯한 그르렁 하는 소리가 크게 난다. 혈류의 변화가 생기며 맥박이 약해지고 사지가 차게 변하면서 피부가 푸릇푸릇하게 변화된다. 목이 뒤로 제쳐지며 얼굴은 미간의 주름이 사라지며 근육의 긴장도가 떨어지며 노란 왁스를 바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한다. 어느 순간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멈춰지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 사망에 이르게 되면 의식이 없고, 숨을 안 쉬며 심장박동 및 혈액순환이 멈추고 소생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자연사의 과정은 과거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노쇠에 의한 사망으로 분류되어 주변에서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의료에서는 죽음은 일반적으로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이며 죽음을 예방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의학적 처치를 시행하여 생명을 연장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 「의료법」에 의한 사망원인 대한 분류는 크게 병사(natural death)와 외인사(unnatural death)로 분류한다. 병사(natural death)는 질병에 의한 사망을 말하는 것이다. 외인사는 질병이 아닌 원인의 죽음을 모두 일컫는 말로, 자살, 타살, 사고사가 이에 해당한다. 이 ‘병사(natural death)’의 다른 번역은 ‘자연사’이다. 완화의료의 관점에서는 ‘자연사’가 더 적절한 번역일 것이다. (2) 죽음보다 못한 삶 의료에서 사람이 살아 있는지 여부는 객관적으로 생체징후(vital sign)를 측정함으로 확인한다. 흔히 생체징후란 체온, 맥박, 호흡수, 혈압을 말한다. 생체징후에는 뇌신경 기능과 관련되어 의식 상태나 활동 여부는 포함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의학이 발달하게 되면서 뇌기능의 이상과 관련되어 뇌사(brain death)나 지속식물상태(persist vegetative status)라는 새로운 국면을 접하게 된다. 뇌사(brain death)란 뇌의 기능이 없어진 상태를 말하는데, 뇌 손상으로 인해 대뇌와 뇌줄기(brainstem)의 기능이 지속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하게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대뇌는 사고와 의식을 담당하는 기능을 하며, 뇌줄기는 호흡과 맥박 등 생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자율신경계를 관장하고 의식조절을 담당하며, 반사중추와 하부 뇌신경 중추를 관장한다. 또한 팔과 다리의 운동을 관장하는 운동신경 신경섬유다발이 위치하고, 청각과 시각반사, 얼굴의 감각과 운동을 관장하는 역할을 한다. 뇌의 기능이 있는지 여부는 상태의 관찰로만은 알 수 없고 뇌파나 뇌혈류검사 등을 시행해서만 확인이 가능하다. 뇌사가 발생하면 그 영향으로 호흡과 심장, 장기의 기능에 모두 영향을 주게 되어 죽음의 과정으로 진행되게 된다. 뇌사와 관련된 윤리적 사항은 다른 본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지속식물상태(persistent vegetative status)는 뇌출혈, 저산소증, 감염 등으로 인해 대뇌피질이 광범위한 손상을 받아 의식 수준이 저하되어 있고 의도적인 움직임이 불가능하고 외부 자극에 대한 의도적 반응은 없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반사 기능은 남아있는 상태를 말한다. 호흡과 심장기능, 장기의 기능은 정상적이나 의도적으로 먹고 마실 수 없으므로, 음식과 영양, 물의 공급이 필요하게 된다. 의료 기술이 발전하면서 뇌사나 지속식물상태가 아니어도, 중증의 환자가 연명의료를 받으며, 삶이 지속되는 경우들이 많아지며 최근에 ‘죽음보다 못한 삶(worse than death)’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병원에 입원한 중증 환자들이 죽음보다 못한 삶으로 호소하는 상태는 대소변을 스스로 못가리는 상태나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사는 상태, 침상에 와병되어 있는 상태, 의식이 혼란한 생태, 급식관으로 사는 상태, 도움이 항상 필요한 상태, 지속적으로 조절되지 않는 통증이 있는 상태 등을 꼽았다. 이런 상태의 환자가 늘어나게 되며 임종 과정이 아닌 환자에서의 삶에서 의도적 죽음이 필요한가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고 안락사에 대한 제도화를 도입하는 나라들이 생기게 되었다. (3)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임과 임종돌봄 호스피스의 어원은 “hospitality”로 중세시대에 긴 여행 동안의 아프고 힘든 여행자에게 휴식처와 피난처를 말한다. 이 용어가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제공되는 특별한 의료의 영역에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8년부터 영국에서 처음으로 시슬리 선더스(Cicely Saunders)가 근대 호스피스를 시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1967년에는 세인트 크리스토퍼 호스피스(St. Christopher’s Hospice)를 개설하면서 전문적으로 임종을 앞둔 환자를 적극적으로 돌보는 의료기관에서 말기질환자를 전문적으로 돌보는 의료가 제공되었다. 그 이후 전세계적으로 호스피스 기관이 확산되었다.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는 2002년도에 완화의료(palliative care)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완화의료는 질환과 관련하여 문제를 가진 환자와 가족의 삶의 질 향상에 목적을 둔 접근으로, 통증이나 신체적, 심리사회적, 영적 문제를 조기에 발견하고 평가, 치료를 함으로 고통을 예방하고 완화시킨다. 이러한 완화의료는 증상관리 뿐 아니라, 심리사회적지지, 영적지지, 임종돌봄과 사별가족돌봄 등 다양한 삶의 질의 향상을 위한 의료적 복지적 서비스이다. 완화의료의 내용은 (1) 통증과 여러 디스트레스 증상을 완화시킴, (2) 삶을 지지하고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임, (3) 죽음을 앞당기거나 지연하는 시도를 하지 않음, (4) 환자의 돌봄에 심리적이고 영적인 부분을 통합시킴, (5) 임종하기 전까지 환자가 삶 속에서 가능한 한 활동을 유지할 수 있게 지원체계를 제공함, (6) 환자와 가족의 요청에 팀차원으로 서비스를 제공함, (7) 질환의 경과 중에 환자와 가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 노력함, (8) 만약 조기에 제공할 수 있다면, 질환 조절 치료와 연계하여 제공함, (9) 디스트레스 관련 임상적 합병증을 관리하고 이해를 돕는 연구를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 완화의료는 호스피스 철학을 바탕으로 발전하고 확산되었으며,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을 받아들이며, 죽음을 앞당기거나 미루려는 시도를 안 한다는 부분에서 안락사와 매우 다르다. 2014년에 개최된 제67회 세계보건총회(World Health Assembly)에서는 ‘완화의료의 강화’에 대해 질환의 연속성(disease continuum) 안에서 질병치료와 함께 보건의료 체계에 통합적으로 제공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과거에 말기환자에게 시행할 수 있는 의료가 별로 없었을 때는 말기로 진단이 되면 기존치료가 중단하고 단절적으로 호스피스가 제공되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와서 의료기술이 발전되며 질환조절치료와 생명연장의료의 중단보다는 질환조절치료가 병행되며 완화의료가 제공되는 형태로 발전되고 있다. 죽음을 앞둔 상태가 되었을 때, 일부 환자들은 발작이나 섬망, 통증 등으로 평안한 임종을 맞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임종돌봄(comfort care)은 임종과정 중에 나타나는 괴로운 증상에 대한 돌봄을 제공해서 편안한 임종을 맞게 하는 것을 말한다. 임종돌봄은 최근에는 의료기관이 아닌, 가정이나 요양원(nursing home)에서도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로 언급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호스피스·완화의료는 1965년 아시아 최초로 시작되었으나, 2000년대에 이르러 정책이 마련되었고, 2008년부터 정부의 전문기관 지정이 시작되었다. 2011년 「암관리법」에 근거하여 추진되다가 2016년에 제정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2017년 8월에 시행되어 확대되고 있다. (4) 생애말기돌봄과 좋은 죽음, 사전에 시행하는 연명의료에 대한 결정 생애말기돌봄(end of life care)는 환자와 가족, 의료진이 질환의 경과상 삶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기간인 사망 전 생애말기 1-2년간의 환자와 가족의 돌봄을 말한다. 영국에서는 2008년에 국가 차원의 생애말기돌봄전략을 수립하며 좋은 죽음(good death)에 대해 정의하였다. 좋은 죽음은 (1) 존경과 존엄성을 가진 한 개인으로 대해지는 것, (2) 통증이나 다른 증상에서 해방되는 것, (3) 친근한 환경 안에 있는 것, (4)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있는 것 과 같은 상태로 맞이하는 죽음을 말한다. 3. 연명의료결정법과 관련 우리나라 주요 사건 (1) 보라매병원사건 1997년 외상에 의한 뇌수술을 받아 혈종을 제거했으나, 뇌부종으로 자발적 호흡이 돌아오지 않아 담당 의사들은 인공호흡기를 부착했다. 그런데 그 남성의 부인은 ‘남편이 사업 실패 이후 가족에 대한 구타를 일삼았고, 살아남을 경우 가족에게 짐만 될 것이며, 이미 260만 원의 치료비가 발생했는데 추가로 발생할 치료비를 부담하기 힘들다’고 하면서 담당 의사들에게 퇴원을 요구했다. 담당 의사들은 퇴원하면 환자가 사망할 거라고 부인에게 여러 차례 설명했지만, 부인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담당 의사들은 ‘퇴원 후 환자의 사망에 대해 법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라는 귀가서약서를 받은 후 환자를 퇴원시켰다. 그리고 환자의 집에서 인공호흡보조장치와 기관삽관을 제거하고 환자를 인계했는데, 환자는 5분 뒤에 사망했다. 대법원은 2004년 해당 의사에 대해 ‘살인방조’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의료계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그리고 이러한 담당의사들의 행위에 대해 대법원은 ‘살인방조죄’로 처벌하면서 정상을 참작하여 그 집행을 유예했다. 이 판결 이후 모든 병원들은 소생가능성 없는 환자라 하더라도 가족의 퇴원 요구(예를 들어, 집에서 임종할 수 있게 해 달라)를 모두 거절하게 되었으며, 안락사에 관한 사회적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2) 김할머니사건 김할머니는 2008년 2월 폐암 조직검사를 받다가 과다출혈로 식물인간이 되어 인공호흡기 하에 중환자실에 입원하였다. 자녀들은 김 할머니가 평소에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앟다고 하며, 인공호흡기 등 연명치료의 중단을 요구하였는데, 영양공급(tube feeding) 중단은 요구하지 않았다. 병원측은 이를 거부했고, 자녀들은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2009년 5월 ‘질병의 호전을 포기한 상태에서 현 상태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연명치료는 무의미한 신체침해행위로서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하는 것이며,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른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할 수 있다’라고 판결하여 최초로 ‘존엄사’의 개념을 인정했다.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병원측은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떼었고, 김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뗀 뒤에도 튜브로 영양을 공급받으면서 8개월을 더 생존하다가 2010년 1월 사망했다. 2009년 대법원에서 '연명 의료 중단' 허락을 받아낸 김 할머니 판결 이후에도 이런 풍토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무엇보다 아직도 '법'이 없다. 어디까지가 정상적인 치료이고 어디까지가 연명 치료인지, 어떤 경우 중단하고 어떤 경우 지속할지 명료하게 정한 기준과 절차가 없다. (3) 제도화 경과 이에 2013년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연명의료중단등 결정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준과 내용을 제시하면서 특별법 제정을 권고하였고, 2015년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 대한 연명의료 유보 및 중단에 관한 법률안이 제안되었다. 이후 법률안에 대한 검토 과정에서 임종 돌봄의 병행 제공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면서 2016년 2월 호스피스·완화의료와 연명의료를 함께 다루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하,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었으며, 2018년 2월 4일부터 시행되었다. 4. 죽음의 제도화: 연명의료결정법의 의의와 한계 우리나라에서 연명의료와 관련하여 이슈가 되었던 두 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임종과정의 환자가 아니라 급성기 수술 후 회복 중인 경우와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에 있었던 경우다. 연명의료결정법에서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임종 과정' 즉, (1) 회생 가능성이 없고, (2) 치료를 했음에도 회복되지 않고, (3)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4) 사망에 임박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국에서 무의미한 연명의료 사례로 논의되는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에 대한 연명의료 결정은 우리나라에서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며 중단결정의 대상이 아니다. 보편적 개념 연명의료결정법 설명 연명의료 결정제도 대상 뇌사, 식물인간 임종과정의 환자 우리나라에서는 임종과정 환자에서의 수액과 영양공급 중단은 법으로 금지함 선택항목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수액, 영양공급 등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투석, 항암제 등 환자의 의견 표현 서식 사전 의료 지시서 advance directives 사전연명의료 의향서 미리 계획을 세워서 의료 목표, 가치관 및 선호 사항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중요 내용 의료 목표, 가치관 및 선호 사항을 논의하고 기록을 위한 사항 연명의료의 중단 등 에 대한 선택만 표시 우리나라 서식에는 개인의 가치와 선호, 선택의 배경 등에 대한 논의와 기록이 불가능함 법적 효력과 처벌 없음 있음 의사 작성 서식 의사의 연명의료결정 서식 POLST (Physician Orders for Life-Sustaining Treatment) 연명의료계획서 우리나라에서의 연명의료계획서는 의정부에서 원본서식 관리하며, 이행절차에 법적 제재에 의하여 관리 법적 효력과 처벌 없음 있음 의료활용 의무기록, 의사처치오더 의무기록아님 별도서식 우리나라의 연명의료결정법의 시행과 연명의료 결정제도의 확대는 법적 근거를 통해 의료기관과 보건소,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 등 공공기관 인프라를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단일화된 정보시스템으로 관리하고 법적인 효력으로 절차적인 부분이 강화되어 있다. 제도화는 형식과 절차를 남긴다. 그러나 연명의료 의사결정의 근본이 되는 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가치관과 남은 삶의 의미를 논의하고 기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향후 제도화의 한계를 넘어서서 진정한 삶과 죽음을 돌아보는 의미가 더 담아지길 고대한다.
1. 과목 소개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은 1978년 개교와 더불어 의예과 1학년에서 의학역사를 다루는 “의학사” 수업을 1학점으로 편성하여 1주일에 한 시간씩 수업을 해 왔다. 당시 수업을 담당한 김종수 교수(소아청소년과학)는 후에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장을 3회,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부총장을 2회 역임한 후 2006년에 은퇴했다. 그 후 필자가 과목을 담당하면서 2학점으로 개편하여 의예과 1학년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두 시간씩 15주간 수업을 해 왔다. 2004년에 “미래형의학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교육과정이 전면 개편되는 과정에서 의료인문학 과목이 많이 개발되어 <의학사>, <의학입문>, <의료인문학>, <의철학>이 의예과 2년간 과정동안 학기별로 하나씩개설된 수업이었다. 2013년부터는 각 과목 고유의 이름을 버리고 다양한 인문학적 소양을 다루는 과목이 <환자-의사-사회>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수업목표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 그 일에 대한 목표와 목적이 분명해야 일을 진행한 후에 평가가 가능해진다. <의학사> 수업의 목표를 정할 때는 모든 의과대학생이 수업에 참여하는 필수과목임을 염두에 두고 목표를 정립했다. 환자를 만나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임상의사를 양성하는 것만이 의학교육의 목표라면 의학의 역사를 굳이 모든 의과대학생이 공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의사가 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은 아주 다양하고, 의사가 해야 할 모든 역할을 모든 의사가 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의사 한 명이 하지는 못하더라도 모든 의사가 한데 모이면 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의학교육과정에 의학의 역사를 다루는 과목을 개설하면서 의학역사교육이 의사에게 필요한 어떤 역량을 갖추게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정해야 했다. 역사를 파헤쳐서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학부에서 할 일이 아니라 대학원 이상에서 다루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의학사> 수업의 목표가 의학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를 양성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암기하는 것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의예과 1학년의 <의학사> 수업은 의과대학생들이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앞으로 의학을 공부하는 중에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형성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과목을 운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세기 초에 프랑스의 라에넥이 청진기를 사용한 것이 의학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봄으로써 사소한 진단기구 하나가 의학에서 기계를 개발하여 이용하려는 자극을 주었고, 지금과 달리 질병 이름조차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시기에 라에넥은 질병 증상을 기록하고 청진에 대한 기록을 남긴 후 환자를 꾸준히 추적관찰해 가면서 질병을 연구했고, 환자가 죽은 후에는 일부를 대상으로 부검을 실시하여 확진과 함께 청진에 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오늘날 청진이 의학에서 아주 중요한 진단기법이 되도록 해 주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역사적 사실을 암기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런 배경과 함께 공부를 하면 장차 의학자가 되었을 때 학문을 탐구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고, ‘청진’과 같은 새로운 발견이 일어나는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학문세계에 대한 관심을 키울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수업목표를 결정했다. 3. 수업성과 2006년도에 처음 과목을 맡았을 때는 수업성과에 대한 개념 없이 소신껏 수업을 진행했지만 2013년과 2018년에 교육과정 개편이 일어나면서 <의학사>의 수업성과도 의학의 3요소인 지식, 술기, 태도를 반영하여 아래와 같이 제시하였다. 가. 지식 (1) 의학역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발견이 의학역사에 미친 영향을 설명할 수 있다. (2) 역사적으로 질병양상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여 설명할 수 있다. (3) 감염병이 정치, 사회, 전쟁 등에 미친 영향을 그 시대상을 반영하여 설명할 수 있다. (4) 질병을 바라보는 질병관이 의학에서 왜 중요하며, 의학역사에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5) 한국의학사의 발전과정을 세계의학사 발전과정과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다. (6) 현대의학에서 의사와 의료인의 지위와 역할이 결정되는 과정을 역사적 맥락을 반영하여 설명할 수 있다. 나. 술기 (1) 말하기와 글쓰기의 중요성을 설명할 수 있다. (2) 독자와 청중에게 내가 의도하는 내용을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다. (3)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한 나만의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 다. 태도 (1) 유용한 자료를 자기주도적으로 취사선택할 수 있다. (2) 의료인(의과대학생)으로서 행동을 결정하기 위한 판단을 할 때 유사한 역사적 사례를 근거로 적절한 기준을 선택할 수 있다. (3) 학자로서 학문을 하는 태도를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하고, 자신의 태도를 결정한다. 4. 개발 과정 필자는 2006년부터 의예과에서 <의학사> 수업을 맡기 전에 여러 학교에서 의학사 수업을 진행한 경험이 있다. 대학시절부터 취미로 의학역사에 관련된 책을 읽다가 박사학위를 받은 후 군의관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학교에서 한두 시간씩 의학역사 수업을 해 왔고, 두 학교에서는 서양의학사를 주제로 반 학기 정도 수업을 한 경험도 있다. 처음 의학역사 수업을 맡게 되었을 때 참고로 했던 책으로는 1990년대에 발행된 것으로 앨러브 라이언즈가 쓴 <세계의학의 역사>, 아커트네히트가 쓴 <세계의학의 역사>, 황상익이 쓴 <재미있는 의학의 역사>, 백영한이 쓴 <의학사 개론> 등이 있었다. 이들 책은 모두 의학의 역사를 시대순에 따라 기술해 놓았으므로 필자도 자연스럽게 시대순으로 수업을 구성했다. 그런데 수업을 할수록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기가 어렵다는 걸 실감하고, 어떻게 하면 수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지가 가장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2001년경 작년에 고인이 되신 신좌섭 교수로부터 재컬리 더핀이 쓴 <의학의 역사>책을 함께 번역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 원서를 검토하면서 의학역사를 주제별로 구성하여 책을 쓴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갑자기 외국으로 장기연수를 떠나느라 번역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2006년에 번역서가 나옴으로써 마침 의학사 수업을 맡게 된 필자가 새로운 방식의 수업계획표를 작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증간고사와 학기말고사를 제외한 수업주제는 아래와 같다. (1) 과목소개, 수업진행방법, 역사란 무엇인가? (2) 고대의학, 신화속의 의학 (3) 질병관의 변화와 의학의 발전 (4) 해부학의 역사 (5) 외과의학의 역사 (6) 미생물학의 역사 (7) 역사를 바꾼 전염병 (8) 전쟁의 판도를 바꾼 전염병 (9) 약의 발전 (10) 청진기의 개발과 진단법의 발전 (11) 분자의학 시대의 도래 (12) 노벨 생리의학상 뒤집어 보기 (13) BT와 IT를 중심으로 보는 미래의 의학 이외에 “피를 활용한 의학의 발전”, “암 연구의 패러독스”, “생명체 복제 기술의 발전” 등의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 가지 수업이 추가되면 기존의 시간표에서 한 가지를 제외해야 했다. 5. 수업진행방법 2006년만 해도 의예과 학생들의 수업집중도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초창기에는 학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주로 강의위주로 수업을 진행했다. 중간고사는 1~3명이 조를 이룬 후 각 조가 의학역사에 대한 특정 주제를 깊이 있게 공부한 후 원고지 약 50매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하게 했다. 비슷한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하지만 작은 주제를 선정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유도했다. 예를 들면 “소화기내과의 발전”보다는 “위 내시경의 발전”에 대한 보고서에 점수를 더 잘 주는 방식이다. 이렇게 한 것은 작은 주제를 깊이있게 파고드는 것이 개론서 하나 읽고 요약하는 것보다는 학자로서의 소양을 갖추어가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잘 썼다고 판단되는 보고서를 제출한 학생들은 별도로 약 30분 정도의 토론을 통해 어떻게 작성했는지를 확인하고 (표절과 같은 학습윤리/연구윤리의 위반 문제가 없어서) 한 주제에 대해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게재를 해도 될 정도로 제대로 공부를 했다고 판단되면 학기말시험을 면제해 주고 중간고사 대체보고서만으로 A+를 확정하는 방법으로 평가를 했다. 이렇게 한 것은 수업시간에 다룬 내용을 학기말 필기시험으로 승부를 보기보다 한 가지 작은 주제를 깊이 있게 파들어가는 것이 학자적 소양을 갖추기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A+는 10~15%밖에 주지 않았고, 중간고사 대체보고서에서 우수하다고 판단하여 면담을 하는 학생들은 15명(보통 10개 조 이내)이 채 되지 않았으며, 면담 후 제대로 공부했다고 판정한 학생은 대상자의 반 정도였다. 학기말 필기시험은 범위가 워낙 많아서 학생들에게 부담이 컸으므로 공부를 대충 한 다음 평소실력으로 시험을 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랬으므로 학생들 사이에서 중간고사 대체보고서를 잘 써서 일찍 A+를 확정지으려는 경쟁이 일어난 것은 좋은 일이었다. 중간고사 대체보고서를 잘 쓴 학생들이 많아지자 2학기에는 강의시간을 줄이고, 중간고사 대체보고서를 잘 쓴 학생들이 발표하는 시간을 부여하는 식으로 수업진행 방식을 바꾸었다. 발표형식도 자유롭게 하도록 하자 단순한 발표가 아니라 뉴스, 토론 프로그램, 모의 재판, 박물관 견학 등 다양한 형태의 발표 방법이 시도되어 수업을 아주 풍부하게 한 것은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중간고사 대체보고서를 잘 쓴 학생들이 발표를 하는 대신 발표계획서를 제출하게 하여 선정된 학생들에게 발표를 하게 하는 방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 후로는 발표를 한 학생들과 하지 않은 학생들의 평가시 학생들이 동의할 수 있는 공정한 방법을 도입하기 위해 학기초부터 취지를 설명하고, 점수 배점에 대한 설명을 아주 상세하게 해야 했다. 매년 평가방법이 조금씩 바뀌었으므로 본고에서는 구체적인 방법 소개는 생략하며, 언제든 필자에게 연락주시면 시도해 본 여러 방법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겠다. 수업주제는 위에 소개한 바와 같지만 중간고사 이후 6~7주는 학생들이 약 30분 정도 발표를 하고, 그에 대한 질문과 토론을 하는 것으로 한 시간을 보내고, 2교시에는 정해진 주제에 대해 강의와 토론을 가미한 형태로 수업을 진행했다. 강의식 수업중에 질문을 하는 경우에는 미리 알려준 자료를 읽고 오면 대답이 가능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예습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고 멍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질문을 받으면 “모르겠습니다”로 일관하는 학생들이 있는 점은 수업에서 아쉬운 점이다. 6. 수업진행자로서 나누고 싶은 경험 (1) 누가 수업을 맡을 것인가? 의학역사를 전문으로 공부하신 분이 아닌 분에게 어떤 이유에서든 한 시간 수업을 해 달라고 할 경우 시대순으로 교육하는 수업하는 참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주제별로 수업을 구성하는 경우에는 그 주제에 대한 내용을 잘 아시는 교육자가 그 시간만 맡아서 수업을 하면 되므로 수업참여를 유도하기가 쉬워진다. 예를 들면 “해부학의 역사”를 해부학 교수에게, “외과의학의 역사”를 외과 교수에게 의뢰하는 식이다. <의학사> 수업의 대부분은 한 명의 교수가 진행했지만 특정 주제, 예를 들면 “미생물학의 역사”는 미생물학 교수가 진행하기도 하고, “질병관의 변화와 의학의 발전”은 철학공부를 많이 하신 내과 교수가 진행하기도 했다. 주제에 따라 드물게는 관련분야를 잘 아시는 교수 한 분을 초빙하여 필자와 함께 두 교수가 동시에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필자의 경험상 두 교수가 참여하여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든. 다른 이야기를 하든 관점에 따라 역사적 해석이나 내용 판단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의과대학생들에게 다양한 견해를 보여 주기에는 도움이 된다. (2) 어떻게 수업참여도를 높일 것인가?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의 입장에서 학생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기 위해 어떻게 수업을 진행할 것인지가 항상 고민거리다. 처음 수업을 한 2006년만 해도 최소한 반 이상의 학생들은 뭔가 배우려고 수업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갈수록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열의는 떨어져 요즈음은 특별히 주의를 주지 않으면 교수들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수업방식에도 다양한 변화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수업시작과 함께 미리 내준 공부를 했는지 점검을 위한 진단평가를 실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가시간이 지나고 수업이 시작되면 강의든 발표든 아예 관심을 끄고 멍하게 있거나 IT를 이용하여 딴 짓을 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세태의 변화라 생각된다. 이왕 수업을 했으니 학생들은 담당 교수가 의도하는 바를 잘 따라서 수업에 따른 효과를 잘 거두어야 한다. 그러나 학생들의 수업집중도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으며, 이는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부터 공교육 수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명성있는 한 명의 강사로부터 개인지도받듯이 학습경험을 한 태도가 대학 수업에도 그대로 파생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사의 일방적 강의가 아닌, 토론을 유도하는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사전에 공부를 하고 와야 한다. 미리 공부할 재료를 나눠주는 건 초기부터 시작했으며, 학생들의 수업참여도가 낮아지는 걸 느낄 무렵부터 수업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IT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수업시작시 미리 내 준 내용을 공부했는지 확인하는 진단평가를 하기도 하고, 수업 둘째시간에 첫째시간에 다룬 내용에 대한 그 날 수업내의 형성평가를 하기도 했다. 또 수업과 관련있는 책을 읽어 오게 한 후 수업시작시 또는 끝날 때 책 내용에 대한 쪽지시험을 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으로 올수록 시험시간만 끝나면 또 주의력이 흩어져 다른 짓을 하는 학생들이 늘어남을 느끼고 있다. 수업효과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지만 의과대학 6년제가 시행되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3) 이 과목의 목표와 성과는 충족되고 있는가? 교육자가 의도한 목표에 잘 도달하여 수업을 통해 성과를 거둘 수 있다면 그 수업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평가자의 입장에서 한 학기가 끝난 후 성적처리를 할 때마다 최근으로 올수록 학생들이 잘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의학역사에서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떼돈을 번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면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까?’ 경제적 내용이 포함된 내용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많이 있지만 그 관심이 수업시간내내 지속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의과대학에서 <의학사> 수업이 목표와 성과를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교수자가 최적의 수업방법 개발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