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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불과 44세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 아래 까뮈) 는 특별한 작품 『페스트』를 남겼다. 참혹한 감염병에 대한 내용이므로 다분히 의학적이고, 인간의 삶과 죽음을 논하다보니 철학적이기도 한 이 소설은 그의 사후 60년이 더 지난 지금 코로나 19를 견뎌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세계적 유행에 대한 까뮈의 생각과 우리들의 현실을 살펴보자. 연대기로 쓰인 이 이야기는 프랑스 식민지령인 알제리의 주도 오랑에서 시작된다. 194X년 4월 16일 출근길에 젊은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계단에서 죽은 쥐를 본다. 수위에게 말하자 누군가 장난으로 가져온 것이라 펄쩍 뛴다. 건물을 잘 관리한다는 소리겠지만 의사는 퇴근길에 주둥이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쥐를 또 보게 된다. 의사의 아내는 폐병으로 일 년 째 병석에 누워 있다가 쥐가 발견된 다음날 요양소로 정양을 떠난다. 역까지 아내를 배웅하고 오던 길에 리유는 열 마리도 넘는 쥐의 사체를 본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부터 쥐들이 떼를 지어 거리로 나와 죽는다. 4월 28일, 하루 동안 죽은 쥐의 숫자는 8천 마리가 넘는다. 사람들은 그 원인을 모르기에 더욱 불안해하고 있다. 13일째 날 죽은 쥐의 숫자는 감소되었으나 그걸 치우던 수위가 병들게 된다. 목과 겨드랑이, 사타구니 임파선에 멍울이 지고 사지가 부어오르며 온몸에 반점이 돋아나면서 죽을듯한 통증을 호소한다. 열은 대번에 40도를 넘으며 불그레한 담즙을 토해내고 끊임없이 헛소리를 하다 발작을 일으키며 숨이 끊어진다. 리유는 시체를 격리시키고 보건위원회를 소집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부각시킨다. 다른 의사들은 선뜻 ‘페스트’라고 진단하기를 주저하지만 리유는 병명을 무어라 부르던 간에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취하는 예방조치를 적용하여 오랑시민 20만 명을 보호하자고 주장한다. 리유가 열병환자를 격리시키고 사타구니의 멍울들을 절개하여 피고름을 짜내고 파리에다 면역 혈청을 주문하는 등 백방으로 애쓰는 동안에도 사망자 수가 점점 늘어나 30명에 이른다. 마침내 지사로부터 공문을 받는다.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봉쇄하라” 이때부터 페스트는 시민 전체의 문제로 대두된다. 시민들은 감금되고 유폐되어 기약 없는 귀양살이에 들어가 제자리에 앉은 채 죄수와 유형수들의 고통을 맛보게 된다. 취재 차 잠시 오랑에 들른 신문기자 랑베르는 이 돌발적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지역 사람이 아닌데다 파리에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온 그로서는 서둘러 돌아가겠다는 일념뿐이다. 그는 리유를 찾아와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부탁한다. 하지만 의사로서 그런 증명서를 발급해 줄 수도 없거니와 써 준다한들 효력도 없다. 도시의 성문은 편지조차 왕래가 차단된 채 철저히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랑베르는 도와주지 않는 의사를 원망하며 관청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끊임없이 탈출을 꿈꾼다. 한편 신망 높은 신부 파늘루는 열렬히 설교를 한다. 페스트란 신이 내리신 인간에 대한 징벌이고 이 재앙이 도리어 인간을 향상시키고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는 내용이다. 페스트에도 그것대로의 유익한 점이 있어서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군중들은 신부의 설교에 술렁이지만 리유에게 종교는 관심 밖이다. 그는 “병고의 유익한 점을 증명하려 하기 전에 치료부터 할 것”이라며 신부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 이 치료란 의사의 신념인 ‘반항’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위가 시작된 6월에는 매주 7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다. 도시는 온통 절망에 사로잡히고 시민들은 향락에 빠져 들어간다. 밤늦은 시각에 중심가에는 청춘 남녀들이 열정을 불태우며 도덕이 점점 헐렁해진다. 그 중엔 이 재앙이 오히려 행복한 사람도 있으니 밀매업자 코타르다. 그는 무언가 나쁜 짓을 하다 체포될 처지라 목매달아 죽으려 시도했던 인물이다. 요행히 죽기 전에 살아난 코타르로선 페스트가 퍼져 도시가 마비되자 안도가 된다. 혼자서 죄수가 되는 것보다 모든 사람과 함께 갇힌 것이 좋은 것이다. 더욱이 그는 암거래를 통해 호황을 누리고 있으므로 내심 페스트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반면에 의사를 도와주는 인물로 타루가 있다. 그는 차장검사의 아들로 열일곱 살 때 법정에서 피고에게 사형선고를 주장하는 아버지의 논고를 듣고는 구역질이 나서 가출을 해버렸다. 그는 그 이후로 줄곧 페스트를 앓아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타루는 자원봉사자를 모아 보건대를 조직하는데 앞장선다. 또 페스트와 싸우는데 공헌한 사람 중에는 시청 말단 서기 그랑도 있었다. 그는 가난한 나머지 결혼생활도 깨졌지만 보건대에서 환자 등록이나 통계 작성 등으로 큰 도움을 준다. 여름 내내 맹위를 떨치던 페스트는 묘지와 화장터를 포화 상태로 만든다. 다행히 10월 하순에 면역혈청이 완성되어 이를 판사의 어린 아들에게 첫 시험을 해 본다. 그 혈청은 명백히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투여받은 아이는 그 효과 때문에 다른 환자들보다 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으며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여준다. 리유가 신부에게 격렬한 어조로 소리친다. “허, 이 아이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습니다. 신부님도 그것은 알고 계실 거예요!” 신부는 의사의 비난에 당황해하며, 이해하지 못할 일이라도 우리는 사랑해야만 한다고 답하자 리유는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사랑을 거부하겠습니다.” 아이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이후, 파늘루 신부도 조금씩 변해간다. 설교 태도도 점차 부드럽고 신중해지며 주저하는 빛을 보인다. 신부도 병이 들었지만 끝까지 진찰을 거부하다가 숨을 거둔다. 추위가 오면 페스트가 물러갈 것으로 기대했으나 12월이 되어도 역병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사람이란 기다림에 지치면 아예 기다리지 않게 되는 법이다. 도시 전체가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살고 있다. 크리스마스도 지옥의 명절이 되고 만다. 성탄절에 말단 서기 그랑은 거리를 떠돌며 옛 사랑을 그리워하다 쓰러진다. 그도 페스트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리유와 타루가 열심히 간병한 결과 병을 이겨낸 사람이 된다. 이윽고 쥐들이 다시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정월이 되자 사망자 통계표에 하향곡선을 보인다. 그런데 이번엔 타루가 아프다. 남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혈청주사 맞는 걸 소홀히 한 결과 페스트에 패배당한 것이다. 타루가 죽은 다음날 리유는 아내의 부음이 담긴 전보를 받는다. 마침내 2월의 화창한 아침, 오랑 시의 문이 활짝 열린다. 밤낮없이 성대한 축하 행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생이별을 참고 지냈던 사람들이 기차역 플랫폼에서 뜨겁게 재회한다. 기자 랑베르의 아내가 제일 먼저 찾아온다. 페스트가 만연한 동안 밀매업으로 이득을 많이 본 코타르는 병이 물러갈 무렵부터 안절부절못하더니 결국 경찰에게 연행되어 간다. 리유는 마지막에 이 연대기를 쓴 장본인이 자신임을 밝히며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점은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점이라 말한다. 작품은 이런 경고로 끝을 맺는다. 페스트는 역사상 30차례나 발생하여 1억에 가까운 인명을 앗아간 재앙이다. 하지만 원인균이 밝혀지고 치료제가 개발되면서 20세기 이후에는 보기 어려운 전염병이 되었다. 그런데도 까뮈가 페스트에 의한 판데믹의 상황을 설정한 것은 마치 오늘날의 코로나 시대를 예견한 것만 같다. 실존주의 철학가로도 인정받는 까뮈는 지독히도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어렵사리 교육을 받았는데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간사의 부조리에 주목하게 되었다. 끊임없이 계곡으로부터 산꼭대기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벌을 받은 시지프의 신화를 인간의 숙명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이러한 삶의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까뮈는 ‘반항’을 강조한다.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포기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다시 굴러 떨어질 자신의 운명을 향해 언제나 다시 돌아서는 시지프의 모습에서 부조리에 정면으로 반항하는 당당한 태도를 취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페스트』는 한낱 질병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까뮈의 페스트는 쥐벼룩이 옮기는 실제의 질병이라기보다는 전쟁이나 억압, 독재, 차별, 빈곤과 기아와 같은 인간사의 부조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감내하는 코로나19의 판데믹으로 느끼는 부조리와 일치하는 점이 놀랄 뿐이다. 작품 속 인물 속에서 판데믹에 대응하는 4가지 유형을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병과 대적하여 끊임없이 싸우는 의사 리유와, 그 친구 타루, 또 성실한 공무원 그랑이다. 둘째는 페스트도 신의 뜻이라며 온전히 받아들이는 파늘루 신부처럼 초월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다. 셋째는 취재차 오랑에 들렀을 뿐 자신은 페스트와 아무 관계가 없다며 도피적인 태도를 보이는 랑베르 기자가 있다. 마지막으로 페스트 덕택에 감옥행이 미뤄지고 혼돈을 틈타 밀매로 호황을 누리는 코타르처럼 재앙을 오히려 축복으로 여기는 부류도 있다. 4가지 유형 중에서 까뮈는 의사 리유를 통해 패배할 지라도 싸워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리유는 판데믹에 대처하는 의사로서 매우 모범적인 선례를 보여주었다. 그는 하루 4시간 정도 밖에 잠을 자지 못하면서 악착같이 진료에 임했고 그 가운데사도 소중한 연대기도 남겼다. 그를 통해 의사의 일관된 철학적 소신이 ‘반항’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이 없다 해도 질병 앞에 선 의사들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당연하다. 소명의식을 가진 의사라면 질병의 의미나 가치를 따지기에 앞서 리유처럼 행동하리라 믿는다.
이 글은 세 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먼저 영장류인 인간과 그들의 사회 및 문화를 연구한다고 알려진 인류학이 근대에 태동한 배경과 학문의 연구 주제와 방법의 특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다음 섹션에서는 인류학내에서 생물학적 현상이자 액운으로서 바라본 질병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세번째 섹션에서는 전염병에 초점을 맞추어, 전염, 방역, 치료의 각 단계별로 인류학 연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인문학적 지견을 역사적 실례를 통해 탐구해 봅니다. 끝으로 의학에서의 과학주의에 대해 짧게 언급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 인류학이란? 가. 근대 인류학의 탄생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 의학과 비교할 때 인류학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학문입니다. 인류학 (anthropology)이라는 용어는 인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nthrōpos와 학문을 의미하는 logy가 결합된 것입니다. 곧 인간에 대한 학문을 의미합니다. 19세기 중후반에 인류학이 발생된 데에는 두가지 학문적, 사회적 배경이 있는데 하나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에 의해 제창된 진화론이며, 둘째는 유럽국가들의 식민지 확장입니다. 진화론은 '적자생존'이라는 테제로 종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생물학에 공고한 학문적 지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인류학자라고 하면 보통 침팬지와 살면서 그들을 연구했던 Jane Goodall을 떠올리게 되죠? 진화론을 기반으로 영장류의 생태와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 생물인류학 (biological anthropology)이 이렇게 태동합니다. 인류학의 다른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사회문화인류학 (sociocultural anthropology)은 19세기 유럽의 식민지 확장에 배경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도 이양선이 출몰했죠. 서구인들은 식민지개척을 통한 비(非) 서구 문명과의 접촉을 넓히며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삶의 양식을 학문적으로도 체계화할 필요를 느낍니다. 초기에는 선교사나 탐험가들의 서신을 통해, 나중에는 식민지 행정관료, 교사, 의사 등이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현지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정리하게 됩니다. 당시는 생태계의 다양성이 종의 진화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학문의 신(新) 조류였으므로, 문명의 다양성도 자연스럽게 사회의 진화라는 틀에 의해 체계화되었습니다. 이들은 문화 전파(cultural diffusion)라는 개념도 도입하는데 이 설명체계에 의하면, 근대국가의 모습을 이룬 유럽은 진화의 정점에 아프리카의 ‘원시적’, ‘야만적’ 문명은 맨 바닥에, 아시아는 아래쪽 어딘가에 위치하며, 문명의 다양성은 삼투압처럼 성숙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전파되며 형성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유럽중심시대에 이는 지배적 문명이론이 되었는데 학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이론이 식민주의에 봉사하였을 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인류학에서는 자료수집을 위해 현장에 가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 시기의 학자들을 암체어 인류학자(armchair anthropologist)라고 부릅니다. 나. 사회문화인류학의 변신 하지만 20세기 초가 되면서, 인류학은 변신합니다. 야만인(savage)라는 용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학문의 내용은 비(非) 유럽주의로 변모하게 되는데 변화의 핵심에는 필드웍(fieldwork)이라는 연구방법론이 있었습니다. 간접 자료에 만족하지 못하던 일군의 학자들이 원주민을 직접 찾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수년간 현지인과 그들의 언어로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경제 및 정치, 친족관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며 기존 자료와 비교 분석합니다. 그 결과 기존의 암체어 인류학자들이 내린 것과는 사뭇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은 비(非) 이성적이라고만 여겼던 원주민들의 삶의 양식이 서구 사회 못지않은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를 예고했다고 평가받는 옥스포드의 에반스 프리차드(Evans-Pritchard, 1902-1973, 아래 에반스 프리차드)경(卿)의 『아잔데족의 마술과 신탁 그리고 주술, Witchcraft, Oracles and Magic among the Azande』(1937) 라는 민족지[1]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수단의 아잔데족과 함께 살면서 해명되지 않은 불운의 사건을 해결하려는 시도로서 신탁(神託)이 운용되는 것을 목도합니다. 필드웍 중에 그는 곡물창고 아래에서 낮잠을 자다 무너진 창고에 깔려 사망한 남자의 사망원인을 밝히려는 신탁의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혹시 아잔데족이 곡물 창고의 안정성, 곧 흰개미가 창궐하고 나무가 썩어서 창고기둥이 부실해진 것과 같은 물리적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은 아닌지 인터뷰를 통해 꼼꼼히 체크합니다. 혹은 사망사건이 마법의 영향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그들의 ‘미신적 성향’에서 기인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본인이 신탁에 참여해 보며 탐구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아잔데족이 창고의 안정성에 대한 물리적 이해가 부족하지 않고 사망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미신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탁을 통해 알아내려고 한 것은 ‘하필 이 시간에 그에게 불운이 닥쳤는가?’에 대한 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삶에 존재하는 근본적 불확실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고, 신탁과 연관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공동체에 생긴 사회적 균열을 봉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아잔데족의 사회가 서구사회만큼 이성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에반스 프리차드의 이 연구는 수년간의 필드웍과 참여관찰[2]을 통해 얻은 자료에 근거하였으므로, 2차 자료에만 의존했던 기존의 인류학자들의 주장보다 훨씬 신뢰가 높았으며 통시성(diachronicity)과 공시성(synchronicity)을 포괄하는 총체적 접근이라는 20세기 사회인류학의 흐름을 만들어 낸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2. 생물학적 현상으로서의 질병과 액운으로서 질환 이제 질병의 문제로 옮겨볼까요? 생물인류학과 사회문화인류학의 두 흐름이 존재하지만 전체론적 접근(holistic approach)을 중시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갖습니다. 생물인류학자는 질병을 진화론의 틀 안에서 사회문화인류학자는 액운(misfortune)의 일종으로서 사회적 속성에 중점을 두지만 둘 모두 긴 시간의 참여관찰을 통해 자료를 얻고 통시적 공시적으로 분석하기 때문입니다. 생물인류학적 연구는 유전체 분석에 기반하여 동일한 유전형을 가진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제2형 당뇨병 및 비만에 있어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하는 표현형의 패턴 분석, 말라리아 창궐 지역에서 발생하는 진화적 적응의 예로 낫적혈구빈혈의 발생, 수렵채집기에서 농경기로의 이행에 의해 발생하는 아래턱의 협소화와 치아의 밀집, 그리고 위생가설에 입각한 자가면역질환의 진화론적 설명이 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분야의 연구들에서는 고고학적 및 생물학적 증거뿐 아니라 수렵채집의 문화를 영위하고 있는 부족에 대한 실증적 연구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생물인류학자가 수렵채집 부족인 아프리카 칼라하리사막 인근 쿵족(!Kung people)이 식사 후 남기고 간 재를 뒤엎고 있다면, 그는 섭취된 음식의 종류와 칼로리 양, 부족원의 이동 시간에 따른 에너지 소비량에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한편 사회문화인류학자라면 제례 주기, 화덕의 모양과 만드는데 쓰인 재료, 음식 준비에 있어 성별, 지위에 따른 역할분담 등에 더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가. 의료인류학 이제 사회문화인류학의 관점으로 옮겨가 볼까요? 20세기 초 인류학의 변모로 인해 사회학(문명사회연구)과 인류학(비문명사회연구) 사이에 존재했던 연구대상에 따른 역할분담이 없어집니다. 자연스레 질병에 대한 연구의 폭도 넓어지며 미국을 중심으로 ‘의료인류학(medical anthropology)’이라는 분야도 생깁니다. 1970년대 이전에는 근대화 이론(modernization theory)[3]에 입각하여 ‘교정’의 대상이라 여겨지던 3세계의 의료의 모습과 치유행태의 기술에 집중했습니다.[4] 하지만 70~80년대로 옮겨오며 체계화된 이론과 정교한 행위와 전승 방식을 갖춘 의료체계[5]인 아유르베다나 중국의학에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6] 한편 알란 영(Alan Young)이나 바이런 굿(Byron Good, 아래 굿)같은 인류학자는 정신의학의 영역에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정신과 전문의 출신인 하버드의 아서 클라인만(Arthur Kleinman, 아래 클라인만)이 대만에서의 현지조사를 통해, 중의학, 서양의학, 무당, 약국 등이 뒤얽힌 복합적 치유체계 안에서 다양한 자격을 지닌 치료자들이 역할하는 모습을 정신의학적 케이스 분석과 민족지적 기술을 결합하여 생생하게 그려낸 책을 출간하였으며, 네덜란드에서는 반 데르 기스트(Van der Geest)가 암스테르담의 병원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를, 그리고 캐나다의 마가렛 락(Margaret Lock)이 일본에서의 현지조사를 통해 전통의학이 의사와 환자에게 받아들이고 이용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를 수행합니다. 이로 인해 보건의료에 한정되어 있던 의료인류학은 본격적으로 ‘의학 (medicine)’과 조우합니다. 핑퐁 외교로 중국이 개방되자 본토에서의 필드웍을 기반으로 의료인류학은 한 차원 더 성장했고, 2000년대에 들어와 장 랭포드(Jean Langford) 같은 학자는 아유르베다의학에 내재된 탈(脫)식민지성까지도 탐구할 정도로 이론과 주제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7] 나. 질병의 사회적 속성 질병에 대한 인류학적 작업의 특징은 질병에 내재된 사회적 속성에 주목하는 것에 있습니다. 클라인만은 앞서 언급된 책에서 ‘tangi(童乩)’라고 불리는 대만 무당의 신내림의례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전환 장애와 심한 우울증을 겪는 환자의 상태가 의례에 참여하면서 회복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는 빅터 터너(Victor Turner, 1920-1983, 아래 터너)가 1960년대 아프리카 뎀부(Ndembu)족에 대한 연구에서 한 젊은이가 겪던 만성피로와 우울증세가 집단 치료를 통해 개선됨을 보여준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8] 이 청년은 오랜 이주 노동 뒤에 귀향하였는데 모친(母親)계 부족구성원과 갈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부족 원로인 치료사는 액운을 일으키는 조상의 이빨을 제거하는 ‘이함바(Ihamba)’라는 의례를 시행하는데, 이에 부족 구성원 전체를 참여시킵니다. 터너는 청년과 부족원들 사이의 갈등이 성공적으로 봉합되는 데 있어 의례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이빨을 제거하는 행위가 일종의 카타르시스로서 역할 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 아래 레비스트로스)가 1949년에 출간한 논문에서 파나마의 쿠나(Cuna)족이 난산을 겪는 산모에게 들려주는 샤먼의 노래를 분석한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이 노래에는 쿠나족이 모시는 여러 신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레비스트로스는 주술사가 ‘험한 산을 넘고 역경을 이겨내는’ 부족신의 모습을 통해 산모의 의식을 지배하는 집단 무의식의 상징 세계로 접근함으로서 ‘산을 넘지 못하고’ 산도에 걸려있는 아이의 출산에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9] 종교인류학의 배경을 가진 굿은 1977년에 발표된 이란 여성들의 심장의 과도한 두근거림과 부인과 증상을 주소로 하는 증후군에 대한 논문에서[10], 이 증후군의 중심에는 이란 사회의 가부장적(家父長的) 구조가 존재한다고 결론짓습니다. 환자들에 대한 참여관찰과 심층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요인과 증상이 가진 의미의 연결망(semantic network)을 분석한 결과였고, 이 연구를 통해 질병의 이해에 있어 생의학적 설명뿐 아니라 의미의 연결망에도 관심을 가져야 함을 역설합니다. 다. 신념의 문제와 의료다원주의 질병에 대해 알아보았으니 이번에는 의학이라는 지식체계 곧 믿음의 체계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과학지식이 어떻게 믿음의 범주에 있는지에 대해 반문할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과학지식이 가진 높은 설명력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코로나 세계적 유행 초기에 모델링에 기반하여 집단 면역을 주장했던 나라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함에 따라 집단면역이라는 개념도 추후 재설정될 것 같습니다. 이렇듯 지식체계는 전문가집단의 합의로 이루어지며 기존의 체계[11]가 통째로 폐기되는 경우도 흔히 발생합니다. 의사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믿음은 진료실에서 환자들이 자신의 설명을 들은 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세련된 설명체계를 선택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환자들의 교육수준이 높지 않아 그럴 수 있다구요? 사회학자 메레디스 맥과이어(Meredith McGuire)가 미국 동부의 중산층 동네에서 이 주제와 관련하여 필드웍을 시행한 바 있는데, 결과는 인류학자 머레이 래스트(Murray Last)가 나이지리아 말룸파시(Malumfasi)라는 곳의 한 시장에서 행한 연구와 일치했습니다.[12] 교육, 경제 수준 그리고 종교에 상관없이 환자들은 어떤 체계가 설명력이 높은지에 대해 의외로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신체 증상과 변화를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체계를 그때그때 자의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아유르베다, 서양의학, 약물치료, 주술요법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나이지리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부자 동네에 사는 과학자, 박사, 예술가들도 크리스탈 힐링, 요가, 자석 치료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이를 의료다원주의(medical pluralism)라고 하는데, 이는 의료서비스의 제공이 다원적(多元的)이라는 것도 의미하지만 환자입장에서 한가지 치료 체계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시장경제체제의 우리나라나 미국의 경우는 그렇다 쳐도 무상의료 국가인 영국이나 캐나다에서도 생의학(biomedicine) 이외의 다양한 의료서비스와 시술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으니 인류학자들의 이런 주장이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전염병에 대한 인류학적 이해 질병에 대한 일반적 관점을 알아보았으니 이제 전염병과 관련한 이슈를 살펴보겠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겪는다는 점에서 전염병에서는 사회성과 환경이 더 강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전염, 치료, 방역으로 구분하여 인류학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을 다뤄 보겠습니다. 가. 전염(contagion) 전염과 관련해서는 동양에서 토사곽란(吐瀉癨亂)으로 알려진 콜레라를 예로 논의해 봅니다. 약 1503년경에 유행의 예가 처음 기록된 후, 콜레라는 1800년대 초반 세계적 유행으로 발전하였고 그 후 여덟 번 창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13] 심각한 설사와 구토, 근육 경련에 의한 급격한 탈수로 수시간 만에 사망에 이르는 질환입니다. 첫번째 유행(1817-1823)은 인도에서 시작하여 남아시아, 남태평양, 중국, 이집트로 퍼졌고, 두번째 유행(1826-1851)에서는 유럽, 북미, 남미 등 전세계를 아우르게 됩니다. 세번째 유행(1852-1859)에서는 전파기전(傳播機轉)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가 마련되는데, 1853년 8월 31일에 런던에 7명의 남자에게 콜레라 증세가 나타났을 때입니다. 역학조사에 나선 의사 존 스노우(John Snow, 1813-1858)가 브로드 가(街)에 있는 지하수 펌프에서 나온 물을 마신 사람들에게만 콜레라 증세가 나타난 것을 알아냈습니다. 같은 동네이지만 양조장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무료로 제공되던 맥주를 마셨기 때문에 콜레라에 걸리지 않은 것입니다. 발병 1주일만인 9월 7일에 브로드가의 지하수 펌프 손잡이를 제거하자 놀랍게도 확산이 멈춘 것입니다.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 1843-1910)에 의해 콤마 모양의 균이 동정된 것은 다섯번째 유행(1881-1896) 때였고 이 균이 콜레라 증세를 일으킨다는 것이 입증된 것은 6차 유행(1899-1923) 때입니다. 1959년에는 인도 학자 삼부 나스 데(Sambhu Nath De, 1915-1985)가 이 균이 소장에서 엄청난 양의 진액을 분비하게 하는 독소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밝힙니다. 6차 유행 기간 동안 50-70%에 달했던 치사율은 1959-1961년에 수분, 당, 염분을 보충하는 경구수액요법(oral rehydration solution-ORT) 이 등장하며 급감합니다. 이 덕분에 인도네시아에서 1961년에 발생한 7차 유행에서는 사망자가 획기적으로 줄었으며, 1970년대에는 분자차원에서 탈수의 기전이 밝혀집니다. 한편 1991년에 페루에서 발생한 8차 유행에서는 치사율이 0.69%까지 낮아졌는데, 이와 동시에 새로운 콜레라 종인 Vibrio Cholerae 0139가 남아시아에서 발견됨에 따라 8차 세계적 유행은 기존의 콜레라균과 새로운 균이 겹쳐 발생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병리 기전에 대한 과학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2010년 아이티공화국에 대지진이 발생한 후 약 470,000명이 감염자와 6,6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주된 전파 기전은 대변-구강 경로(oro-fecal route)이며, 하수 유입이 쉬운 근해(近海)에서 콜레라균이 군집을 형성하다 어패류를 통해 인체 내로 유입되며, 초기 3일 동안 한 명이 설사를 통해 쏟아내는 분비물에 포함된 균이 무려 천만 명을 감염시킬 정도의 전염력을 지닌다고 합니다. 생물인류학에서는 역학적 삼각형(epidemiological triangle)이라 불리는, 원인인자, 사람, 환경의 상호관계 안에서 자연선택이 전염병 창궐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탐구합니다. 잘 알려진 예는 말라리아가 잦은 곳에서 빈발하는 낫적혈구빈혈입니다. 인체가 적혈구내에서 성장하는 말라리아 유충의 생활사를 방해하기 위해 숙주 역할을 하는 적혈구 자체를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이며, 이는 전염병에 대해 인체가 진화적으로 대응하는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생리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8차 유행에서 발견된 새로운 콜레라균과 관련하여 원인인자 입장에서 가설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기존 균주에 비해 독성이 훨씬 덜한 반면 장기간 설사를 일으키고, 체외에서 오래 생존하며, 면역 현상을 전혀 발생시키지 않고, 음식을 통해서도 전염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새로운 균체의 발생은 콜레라균 입장에서 보면 진화적으로 적응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지난 400년간 콜레라균의 입지가 많이 약화되었는데, 이는 짧은 시간에 사망에 이르는 급격한 숙주 반응에 의해 방역이 촉발된 결과이므로, 콜레라균이 생태계내에서의 번식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독성은 약화시키되 전염 경로를 다양화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것이지요. 오미크론 변이를 일으킨 코로나바이러스도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나. 치료(treatment) 역학적 삼각형의 다른 한 축인 환경에 대해서는 변수가 너무 많아 생물인류학보다는[14] 사회문화인류학자들의 분석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는 치료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많은 것이 밝혀졌지만 항생제만으로 콜레라의 유행을 막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전염병은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인해 사회시스템이나 환경이 파괴된 곳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식이 자원의 부족으로 부시미트(bushmeat) 라고 불리는 야생동물을 섭취함으로서 전 세계로 퍼질 뻔한 에볼라출혈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에 따라 학자들은 전염병의 대응에서 정치경제적 요소가 중요함을 역설합니다. 앞서 언급한 클라인만과 굿의 제자인 의사 출신 인류학자 폴 파머(Paul Farmer, 아래 파머)는 아이티공화국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난한 나라가 질병 부담을 높은 수준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나라가 겪은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가난의 질병이라고 불리우는 ‘결핵’을 언급합니다. 광부들의 진폐증과 함께 산업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 질환은 산업혁명 전에도 흔했습니다. 창백한 얼굴과 토혈(吐血) 그리고 마른 몸이 아름다움을 일으킨다고 여겨져 여성들이 한 때 앓고자 한 질환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침방울을 통해 공기 중으로 전파되는 결핵은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밀집된 주거 및 노동환경으로 인해 산업화가 한창이던 18~19세기 영국 사회를 휩쓸면서 많은 사망자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에드윈 채드위크(Edwin Chadwick, 1800-1890)과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 등이 주도한 보건위생 및 사회개혁운동으로 환경이 개선되며 사망률도 감소하게 됩니다. 이는 항생제가 발명되기 훨씬 전 일인데, 이런 역사적 교훈은 돌이켜보면, 결핵의 치사율은 항생제만으로는 낮추기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파머는 아이티공화국에서 결핵 퇴치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이 경제적 어려움과 국가 기능의 약화로 항생제를 꾸준히 복용하지 못하고 결국 사망하는 케이스들을 많이 접합니다. 집단 전체로 볼 때 이는 항생제 내성균의 발생을 촉진시키는 일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나라의 상황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국가 실패의 징후로서의 결핵 창궐의 뿌리가 17세기부터 유럽, 아메리카 대륙, 서아프리카를 기점으로 행해진 노예 수입의 종착점이자 중간지 역할을 한 아이티의 식민주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곳은 설탕 생산의 중심지로 현지 노동력으로서 노예들이 필요했고, 나중에는 미국 남부의 면화농장에서 일할 노동력을 공급하기에 좋은 지점이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발발과 함께 아이티는 운 좋게 1804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엄청난 빚을 졌고, 무려 100년이 넘게 프랑스와 미국의 은행에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했습니다. 애초부터 아이티는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라는 명예에 걸맞은 발전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국민들보다 노예들에 대한 노동 착취로 성장한 플란테이션의 오너들과 사업에 투자한 서구인들의 입장을 중시해 준 결과입니다. 결국 제국주의 시스템과 착취적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적 구조가 아이티 주민들과 후손이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폭력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슷한 역사적 운명을 겪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다. 방역(management) 방역과 관련해서는 격리(isolation)가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전염병 관리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격리의 중요성을 인식했습니다. 격리된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사회적 죽음을 맞는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기간 동안 이들에게는 사회적 의무가 면제되고 권리가 박탈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만나보았던 터너는 개인이나 집단이 일상의 단계에서 벗어나 경계에 위치해 있는 이런 상태를 경계성(liminal state) 혹은 리미날리티(liminality)라고 명명했습니다. Liminal이라는 말이 문턱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방의 안도 밖도 아닌 중간의 단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터너는 이를 구체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상태(betwixt and between)’로 부르기도 했는데 그는 이 리미날리티에서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공동체 의식[15]이 형성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격리와 거리두기를 경험하면서 일상과 협력의 중요성을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격리의 의례는 무언가에 의해 오염이 되었거나 생애주기를 지나면서 개인의 사회적 역할이 모호해질 때 행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프리카에 존재하는 월경 오두막(menstruation hut)이 있는데, 생리를 하는 여성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이 제도가 존재하는 배경에는 생리혈을 오염물질로 보는 이유도 있지만, 생리를 하는 여성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인식을 치르는 아이들을 수일 혹은 수개월간 공동생활을 시키면서 통과의례를 거친 후 어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한 후 사회로 복귀시키는 의례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격리의례동안 여성이나 아이들은 사회구성원로서의 의무와 권리에서 벗어납니다. 정상적인 몸의 생리 활동을 겪는 여성입장에서는 불쾌한 일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이 기간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통제된 여성들에게는 그들만의 공간에서 초경을 맞이한 이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제공해주는 장소로서의 순기능도 합니다. 성인식에 참가한 소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성인식 과정 중에 자신의 이름마저 빼앗기고 힘든 일도 겪어내야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또래들 간에 동료의식이 싹트고 이는 부족사회를 지탱하는데 두고두고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복잡했던 일상은 단순화되고 사회적 자아가 소멸된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코로나가 종식되었을 때 우리가 겪었던 동료 의식도 사회를 위한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4. 나가기: 의학에서의 과학주의 지금까지 질병과 전염병에 대해 인류학적 관점에서 검토해 보았습니다. 먼저 근대인류학의 탄생과 생물인류학과 사회문화인류학의 학문적 특성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질병에 대해서는 생물학적 현상으로서 진화론적 관점을 그리고 액운의 일종으로서의 사회적 속성을 중시한다는 점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생의학적 이해 방식이 왜 절대적이지는 않은지에 대해 논의했고 이어서 의료다원주의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으로 전염병을 전염, 치료 및 방역의 단계로 나누어 콜레라와 결핵의 역사적 실례와 격리행위를 중심으로 여러 이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과학주의(scientistism)에 대한 비판으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과학주의란 자연과학의 방식과 이론을 타 영역에 무리하게 적용시키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앞서 인류학은 통시성과 공시성 모두를 추구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는 의료에 대한 연구에도 적용됩니다. 한국의 의사직군은 전문화 과정, 법체계 등으로 볼 때 사실상 생의학적 체계에 포섭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서양 해부생리학에 기반해 인체와 질병을 이해한다는 것이지요. 이에 따라 과학주의적 경향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술실에서 참여관찰을 진행한 펄 카츠(Pearl Katz)의 연구[16]는 의학 내에서 과학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할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구체적으로 멸균이라는 과학적 이상이 사회적 합의에 기반을 두고 실천되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수술실 내에서 오염구역과 멸균구역이 구분되는 것에 주목하는데, 재밌게도 수술 전 준비, 피부절개, 처치 및 봉합으로 이뤄지는 수술의 의례가 행해지면서 절대적인 것 같던 소독된 것과 오염된 것의 구분이 스탭들에 의해 수시로 재규정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에 따르면 ‘환자의 피부는 수술 전에 소독약으로 깨끗이 씼었음에도 불구하고, 절개 과정에서는 소독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고 ‘수술 전에는 소독되지 않았다고 여겨지던 환자의 피와 내부 장기는 일단 수술이 시작되면 소독되었다고 간주’[17]되며 피부 절개 전까지는 철저하게 지켜지던 두 구역의 구분이 봉합의 과정에서는 모호해졌다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할 때에는 이마저도 완전히 무너짐을 보여줍니다. 그는 더 나아가 수술실에서 멸균과 오염이 수시로 재정의되는 과정에서 직종별 위계질서, 법적 책임, 상황적 편의성 등 과학적 요소만이 아닌 사회적, 도덕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밝혀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멸균의 이상만을 좇는다면 대부분의 수술은 실패할 것입니다. 집단 면역의 과학을 충실히 따르고, 마스크의 예방효과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마스크 쓰기를 거부한 나라에서 코로나 초기에 희생자가 많았던 반면, 경험적인 결과를 토대로 마스크 쓰기에 전념하며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과학주의의 덫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과학적 방법을 존중하되 신봉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공부는 무지를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무지를 깨달아 배움을 시작하고 새롭게 배워 아는 대로 살다 보면 생각과 마음이 스스로 그러해진다(自然). 공부는 자연을 배워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 일이다. 2년 가까이 온 세상이 함께 겪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아래 코로나19) 또한 우리가 배워야 할 자연이다.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자연은, 자연의 정복자라는 자만에 빠져 있던 과학과 현대인의 무지와 무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사태는 우리가 당장 극복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잘못된 앎을 고치고 새롭게 배워야 할 자연이기도 하다. 이제 코로나19로부터 배우고 행해야 할 것들을 역사와 의학의 경험 속에서 찾는 공부를 시작해 보자. 인류의 역사는 늘 역병과 함께해 왔다. 약 1만 2천 년 전 무렵 농사를 짓고 한 지역에 모여 살게 되면서 역병의 유행은 더 빈번해졌다. 거의 모든 열량을 한두 가지 작물에서 취하게 되어 음식의 다양성이 줄고 필수 소량 원소의 섭취가 제한되면서 오히려 영양 상태의 균형이 무너졌다. 역병에 더 취약해진 몸을 갖게 된 것이다. 야생동물을 길들여 함께 살게 되고 저장된 곡식을 탐하는 기생 동물이 들끓게 되면서 동물과 인간의 벽을 넘는 감염병도 많아졌다. 자연정화의 한계를 넘는 오물이 쌓이면서 해충과 병원체도 많아졌다. 전쟁과 교역을 통한 왕래가 잦아지면서 유행의 범위도 넓어졌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세계적 유행으로는 14세기 유럽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고 간 페스트와 1918년 5천만 명을 희생시킨 스페인 독감이 있다. 14세기에 고려나 조선에 흑사병이 유행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스페인 독감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14만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든 세계적 유행이 똑같은 패턴으로 오고 가는 것은 아니다. 중세 흑사병은 여러 해 동안 머물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고 최근까지도 크고 작은 유행을 일으키고 있다. 스페인 독감은 두 차례 유행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그 이후 거의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중세의 흑사병은 유라시아 초원을 가로지른 정복자들이 생태계에 가한 충격이, 스페인 독감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생태 파괴와 대규모 인구이동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도 완벽한 인과관계가 밝혀지지는 않았다. 지금은 누구나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라는 세균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흑사병과 스페인 독감의 원인인 걸 알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 원인균을 몰랐다고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건 아니다. 흑사병이 유행할 당시 의사들은 새 부리 모양의 가면 속에 각종 향료를 넣어 공기를 정화시켰고, 스페인 독감이 유행했을 당시의 사진을 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이 병이 공기를 통해 전파된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질병의 원인에 관한 불완전한 지식은 종교적 신념과 결합해 이교도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폭력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흑사병 유행 당시에는 유대인이 손쉬운 희생양이었다. 병원체를 특정하지는 못했어도 감염병 예방법을 발견해 상당한 효과를 보기도 했다. 두창(천연두)은 현대적 백신이 개발되기 훨씬 이전부터 효과적인 예방법이 개발되었던 감염병이다. 15세기 중국에서는 두창 환자의 고름이나 딱지를 피부에 낸 상처에 문지르거나 코로 흡입하는 예방법이 유행했으며 이 방법은 다산 정약용에 의해 조선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 인두법은 이후 더욱 안전한 종두법으로 발전했고 1979년 이후 새로운 환자가 발견되지 않은 두창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해롭지 않은 자연으로 전환된 유일한 감염병으로 선언되었다. 경험과 상식이 개발한 예방법을 과학이 이어받아 완성시킨 모범 사례다. 19세기에는 결핵과 콜레라가 주요 감염병이었다. 이 시기에는 감염병의 원인균들이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지만, 정작 감염병으로부터 인구를 지켜준 것은 병원체를 직접 공격하는 의학적 개입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하수도를 정비하고 주변을 청소하며 자주 환기를 하는 등의 일반적 공중위생, 그리고 영양과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등의 사회적 대책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의학의 미시적 접근은 언제나 인간의 심리적 반응과 사회적 대책에 연결될 때에만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감염병의 생물학적 원인은 세균과 바이러스일지 모르지만 그 병원균을 키우는 건 가난과 무지, 불평등과 무관심 같은 사회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직시한 당대 최고의 의학자 루돌프 비르쇼(Rudolf Virchow, 1821~1902)는 “의학은 사회과학이며 정치학”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19세기와 20세기는 의학의 성공스토리가 넘치는 시기였다. 특정 감염병을 일으키는 세균과 바이러스가 발견되었고 그것들을 퇴치할 수 있는 소독과 위생, 백신과 항생제가 발명된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한계가 드러났다. 발명 초기의 페니실린은 만병통치약에 가까운 효력을 발휘했지만, 머지않아 세균들은 그 살균력을 피하는 교묘한 기술을 터득했다. 바이러스는 다양한 변이 종을 진화시켜 과학과 인간을 조롱했다. 병원체와 인간 사이의 무한 군비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서양인들은 19세기에 와서야 의학이 정치학이라는 과격한 주장으로 의학의 사회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질병과 사람과 사회를 아우르는 생물-심리-사회 모델을 개발했지만, 그 방법과 사유는 여전히 요소 환원적이며 초점은 언제나 사람이나 나라가 아닌 질병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 의학에서 의(醫)의 대상 속에는 이미 병(醫病, 醫疫)과 사람(醫人)과 나라(醫國)가 포함되어 있었다. 병과 사람과 나라를 다스리고 보살피는 일은 치자(治者)와 의자(醫者)의 공통 과제였다. 우리가 코로나19와 싸우고 사귀면서 그것과 더불어 하나의 자연이 되기 위해서도 이 세 가지를 연결하고 통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질병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닌 나름의 ‘자연’인 병과 사람과 나라를 다스리고 돌보아 새로운 자연으로 만들어가는 전략 말이다. 역병을 다스리고 돌보기 위해서는(醫疫) 그것을 막는 방역(防疫)과 그것에 적응해 새로운 몸으로 변해가는 면역(免疫)의 전략이 활용된다. 거리두기와 개인위생으로 병원체와의 접촉을 피하는 것은 방역이고 백신을 통해 바이러스와 싸우고 사귀는 것은 면역이다. 둘 다 세균과 바이러스를 대상으로 하는 생물학적 대응 전략이다. 병원체와의 접촉을 피하는 방역은 이해하기 쉽다. 개인은 접촉을 피하고 사회는 접촉의 기회를 줄이는 대책을 만들어 시행하면 된다. 병원체에 이기는 체력과 체질을 만드는 면역은 좀 더 복잡하다. 우리는 항원과 항체가 열쇠와 자물쇠처럼 결합하는 기계적 면역 모델에 익숙하다. 하지만 현대 면역학의 네트워크 이론에 따르면 면역은 단순한 공격-방어가 아니라 면역세포와 면역물질들의 네트워크가 항원을 만나 혼란을 겪다가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병원체인 바이러스도 변하고 숙주인 인간의 면역 네트워크도 변한다. 면역은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자연으로 가는 길이다. 사람도 생명인 만큼, 그 마음도 살아남아 후손을 남기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다급한 위험은 무조건 피하고 적령기에 이르면 짝을 찾아 사랑을 나누려 하는 것도 이렇게 진화한 마음이다. 하지만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그처럼 ‘빠른 마음’이 오히려 생존과 번영에 방해가 되는 상황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진화한 것이 이치를 따져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느린 마음’이다. 세계적 유행 초기에 특정 지역을 감염원으로 지목하여 비하하고 혐오했던 사람들은 빠른 마음이 강한 사람들이며, 이후 지속적으로 감염 경로를 추적해 감염자를 격리하고 돌보면서 백신과 치료제의 개발을 기다렸던 건 느린 마음의 소산이다. 빠른 마음은 병원체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방역에 유리하고 느린 마음은 병원체를 품어 새로운 자연을 만드는 면역에 유리하다. 코로나19의 충격을 겪으면서 그리고 그것을 막아내고 길들여가면서 변해가는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함께 살아가는 다른 몸과 마음들과의 연결망을 통해 사회적 정체성으로 구현된다. 나라마다 대응 방식이 다르고 감염의 확산 양상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는 건, 몸과 마음 그리고 그것들의 연결망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계적 유행 초기에 인권과 사생활 보호를 명분으로 마스크 쓰기와 거리두기를 거부했던 이른바 선진국 시민들은 각자의 몸과 마음이 독립이라는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다. 유행 초기부터 국경을 철저히 틀어막고 외출조차 금지했던 나라들의 정책은 집단을 개인에 앞세우는 집단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통제적 방역 대신 집단 면역을 목표로 삼은 스웨덴 같은 나라도 있었다.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얼마간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집단주의 정책인 셈이다. 이런저런 논란이 있긴 해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방역이 무척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철저한 검사와 추적,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불편을 감수하는 아량, 확진자와 격리자에 대한 체계적 돌봄의 체계, 그리고 이 모든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관리하는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 IT) 연결망의 확보 등이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개인도 집단도 아닌 또는 개인과 집단을 모두 포괄하는 “관계”의 사유에 바탕을 둔 마음이고 정책이다. 있음은 언제나 더불어 있음이라는 걸 몸으로 아는 우리들이다. 코로나19는 아마도 온 인류를 심각한 곤경에 빠뜨린 21세기의 대표 유행병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고통스럽게 그 병을 앓았으며 후유증을 겪고 있다.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은 건전한 정서 발달이 지연되었고 영업을 하지 못한 소상공인들의 생계가 어려워졌다. 오랫동안 휴식 없이 일해야만 하는 의료인 특히 간호 인력의 고통도 심각하고 공공의료의 확충도 시급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 싸움은 아직 진행형이다. 하지만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고 중증도가 낮아짐에 따라 이제는 이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야만 하는 시점에 다다른 것 같다. 백신은 바이러스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바꿔 서로 친해지도록 하는 인위적 자연이다. 바이러스는 각종 변이종을 진화시켜 인간의 공격을 피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와 더불어 사는 자연 속에 포섭될 것이다. 지금은 싸움 중이고 화해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제는 무조건적인 적대를 넘어 화해의 전략을 모색해야 할 때다. 백신은 우리들 자신을 변화시켜 바이러스와 사귈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있다. 바이러스는 변이 종을 진화시켜 인간의 공격을 피하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서라도 인간과 공존하는 길로 진화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전투적 칼춤을 추는 바이러스의 관중이며 희생자였지만, 이제는 그 춤사위에 감응하여 전체 춤판을 새롭게 기획하고 참여하는 춤꾼이 되어야 할 때다. <수궁가>의 범은 온갖 위세를 떨며 내려오지만 자라의 순진한 공격에 혼비백산한다. 그 모습을 담은 춤이 장안에 화제다. 범의 위엄과 위선을 재기발랄한 해학으로 비웃는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그 모습을 흉내 낸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어색한 듯 어우러지는 춤사위는 우리가 코로나19-19와 함께 추어야 할 춤을 연상케 한다. 우리가 코로나19와 함께 추어야 할 춤 속에는 우아한 어울림도 명확한 질서도 없다. 스스로 그러한 삶의 역동성이 담긴 어색한 듯 아름다운 춤이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아는 것들을 동원해 코로나19에 관한 무지를 극복하려 했지만, 결국은 또 다른 무지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인간의 무지와 그들이 살아가면서 추는 춤의 어색한 아름다움을 깨닫고 즐기는 것이 진짜 공부 아닐까?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과 불완전함과 불확실성을 견디고 즐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일 터이다.
미담 서정주의 ‘문둥이’는 아주 짧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명시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를 읽고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MZ 세대는 흔치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21세기가 시작되고 22년째를 맞이한 지금은 1936년과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애기를 먹는다는 것은 범죄에 해당하므로 가능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치료 방법이 없고 외모가 변해가는 공포의 감염병이었던 까닭에 그 시대에 문둥이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실감하게 합니다. 대한나관리협회(현재의 한국한센복지협회)에서는 1999년 3월부터 “나(癩)”라는 용어 대신 한센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간질’을 ‘뇌전증’으로, ‘정신분열증’을 ‘조현병’으로 바꾼 것처럼 ‘한센병’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자는 것은 용어가 지닌 바람직하지 못한 은유를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미국 저널리스트 수전 손택이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지적했듯이 올바른 지식을 전달하기 어려운 용어는 올바른 지식을 전달할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합니다. ‘간질’, ‘정신분열증’, ‘나병’, ‘문둥병’은 모두 의학지식이 아주 부족할 때 붙인 이름이며, 오랜 기간 사용되는 동안 질병에 대한 지식이 많아져서 이제는 더 이상 공포와 혐오의 질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포와 혐오에 대한 은유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가 의예과 2학년이던 1984년, 현재는 유튜버이자 비뇨의학 전문의로 활동중인 이웅희 원장의 권유로 소록도 방문 기회를 잡았습니다. 의학과 1학년 10여 명, 의예과 2학년 10여 명, 의예과 1학년 2명으로 이루어진 방문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토론에 임해야 했습니다. 이 때 서정주의 시와 함께 한센병 환자인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길-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도 알게 되었습니다. 의학이라곤 의학영어 외에 공부한 적 없는 의예과 학생이 “발가락이 없어지고 잘리는” 싯구를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미생물학 시간에 한센균에 대해서 배울 때 말초신경이 마비되면서 생기는 현상이어서 통증이 없이도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환자를 만나고 온 다음이어서 이 부분만큼은 머릿속에 쏙쏙 들어갔습니다. 소록도에 가기 전에 선배들로부터 여러 번 들은 것처럼 우리가 만난 환자는 한센병을 전파하지 않는 음성 환자들이었고, 보통 사람과 전혀 차이가 없는 웃음 가득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완치되어 사회로 나가셨다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자신이 살던 곳을 방문한 분을 만난 것도 ‘더불어사는 삶’에 대한 의미를 실감하게 했습니다. 17대 원장으로 11년 9개월을 보내신 고 신정식 원장님을 비롯하여 의사와 공중보건의 선생님들을 만난 경험은 의학공부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게 했습니다. 한센병이 역사에 기록으로 등장한 것은 기원전 약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센병이 등장하는 이집트 파피루스의 작성시기는 기원전 약 1500년부터 2400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인도에도 기원전 약 600년경에 한센병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고, 알렉산더가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인도로 쳐들어갔다가 유럽으로 방향을 튼 기원전 4세기에 역사에 확인할 수 있는 유럽 최초의 한센병 환자가 등장합니다. 기록으로 추정하면 한센병은 알렉산더의 군대를 통해 인도에서 유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말기에 이르러 환자들이 흉한 모습을 드러내면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신이 내린 벌로 생각했으며, 두창(천연두), 매독과 더불어 신체에 변형이 생기는 까닭에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는 신세가 되곤 했습니다. 영화 벤허에서 얼굴을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한센병 환자를 건드리자 낫는 장면은 성서 내용을 잘 모르던 필자에게 기적과 의심이 동시에 솟아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말미인 13세기에 유럽에서 한센병 환자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대책은 없고, 시간이 지나면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이 무서운 질병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되었으므로 환자를 마을밖으로 쫓아내는 풍습이 생겨났습니다. 마을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을 leprosarium(한센병 환자 수용소)이라 하며, 종교적 신념으로 이들을 보살피면서 평생을 바친 종교인들이 이들과 함께 했습니다. 성서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본 라자루스의 이름을 딴 라자루스 수도회 소속 종교인들이 대표적인 분들입니다. 아라비안나이트로 유명한 중세 이슬람 지역에서는 오늘날의 병원과 유사한 시설이 이미 있었지만 유럽에서는 병원의 역사에서 leprosarium을 병원의 시초로 보기도 합니다. 19세기에 현미경이 의학과 생명과학에 널리 사용되면서 세균과 같은 미생물 관찰이 가능해졌습니다. 노르웨이의 베르겐에 있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시설에 근무하던 한센(Gerhard Henrik Armauer Hansen, 1841~1912)은 1871년 한센병에 환자의 조직세포에서 새로운 세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한센병이 피부접촉으로 전파되고, 환자를 소독하고 격리 치료하는 등 한센병 해결을 위해 공헌했습니다. 그는 여러 한센병 환자의 결절에서 발견한 세균을 1873년에 처음 보고했습니다. 한센은 이 세균을 Mycobacterium leprae라 명명했지만 이 세균이 한센병이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876년에 독일의 코흐(Robert Koch, 1843-1910)가 탄저의 원인이 되는 탄저균을 발견하면서 특정 세균이 특정 감염병의 원인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4가지 가설을 정립했습니다. 코흐는 이를 이용하여 1882년에 결핵균, 1883년에 콜레라균을 발견했고, 후대 학자들은 이 4가설을 토대로 수많은 감염병의 원인균을 찾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1879년에 한센은 자신이 발견한 세균을 나이저(Albert Ludwig Sigesmunt Neisser, 1855-1916)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한센균을 발견한 것은 한센이지만 이 세균이 한센병의 원인균임을 증명한 것은 나이저입니다. 그는 임질 원인균을 발견함으로써 과거에 매독으로 알려져 있던 성병이 매독과 임질이라는 두 가지 병으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세균을 사멸할 수 있는 합성 화학요법제와 곰팡이가 함유하고 있는 물질인 항생제가 발견됨으로써 한센병 환자는 급감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한센병은 한센이 1873년에 나균을 발견하면서 이 세균에 의해 발생하는 병만 한센병으로 정의되었습니다. 즉 한센균이 발견된 경우에만 한센병이라 할 수 있지만 성서는 의학지식이 일천하던 시기에 증상만 보고 쓴 것이므로 성서에 leprosy라 표기된 나병이나 문둥병이 오늘날의 한센병과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1978년에 영어로 발행된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는 “leprosy”라는 단어 대신 감염병, 즉 “infectious disease”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고, 표준새번역 한글성경에서도 “문둥병” 대신 “악성 피부병”이라는 영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일단 한센병이 발생하면 치료를 한다고 해서 변형된 부위가 원상태로 복구되지는 않지만 현재는 조기진단과 효과 좋은 치료제에 의해 환자가 크게 줄고 있는 중입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한센병이 문제가 되는 나라는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 20여개국 정도 있으나 점점 환자가 줄고 있는 것이 다행입니다. 프랑스 출신의 폴레로(Raoul Follereau, 1903-1977)가 제창하여 1954년에 1월 마지막 일요일이 ‘한센병의 날’로 제정되었습니다. 폴레로는 1940년대부터 한센병 환자를 위한 활동을 시작하여 아주 호소력이 강한 글과 행동으로 한센병 환자를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46년에 한센병 환자들을 도와주는 것을 목적으로 단체(Order of Charity)를 조직했고, 이것이 후에 자신의 이름을 딴 “라울 폴레로 재단”이 되었습니다. 그는 1977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센병의 날 제정, 미국 대통령과 소련의 당 서기에게 폭탄 하나 제조에 해당하는 비용을 기부하라는 편지를 보내는 운동을 전개했으며,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한센병을 거의 해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한센병의 날(world leprosy day)을 기념하여 1988년 1월 31일 파키스탄에서 발행한 우표에 “한센병은 치료 가능하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1916년 2월 24일 일제 시대에 조선총독부는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들을 집단 수용하는 등 전국 곳곳에 환자촌을 조성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환자들에게는 비인간적인 처사라 할 수 있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단지 그 마을에서 비인간적인 처사가 발생한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이청준은 『당신들의 천국』에서 한센병 환자들에게 헌신하는 의사상과 한센병 환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인간상(의사 포함)을 대조적으로 기술했습니다. 오늘날에는 한센병을 거의 해결함으로써 소록도를 제외한 한센병 환자 마을이 거의 사라졌고, 한센병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가 잊혀져 가는 과거로 남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센병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로 이 글을 읽기 시작하신 분이 있다면 앞에서 나온 시 두 개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서정주와 한하운의 시를 읽으니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한센병 환자를 바라보고 쓴 서정주의 시, 환자의 입장에서 쓴 한하운의 시를 대하며 인류의 건강을 유지하는 일을 하는 의사들이 지녀야 할 바람직한 마음의 태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제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감염병과 서(書)’에서 ‘서(書)’는 시서화(詩書畵)의 하나에 해당하는 ‘서(書)’인데, 이러한 맥락에서 ‘서’는 글씨 혹은 더욱 구체적으로는 서예라는 의미에 가깝다. 그런데 감염병과 글씨를 연결시키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글씨라는 의미에서 ‘서’를 문자 혹은 문자가 표현하는 개념으로 확장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감염병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과거에서 현재까지 동서양에서 사용되었던 다양한 용어들을 살펴보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통해 인류가 감염병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개념화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세계적 유행으로 인해 이전에는 전문용어로만 사용되던 상당수의 의학용어가 이제는 누구나가 아는 일상적 용어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용어가 팬데믹(pandemic)이다. 팬데믹은 전부, 전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pan’과 사람들을 의미하는 ‘demos’가 결합된 용어다. 유사한 용어로 유행병을 의미하는 ‘epidemic’이 있다. 이는 영어의 ‘to’나‘upon’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전치사‘epi’에 역시 ‘demos’가 결합한 것이다. 여기서 ‘데모스’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사람들을 말한다. 영어로 표현하면 ‘person’이 아니라 ‘people’에 해당하는 말이다. ‘데모스’는 민주주의를 뜻하는 ‘democracy’에서도 만나는 말이다. 민주주의란 한두 명의 권력자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demos), 즉 시민의 권력(kratos)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즉 팬데믹이건 유행병이건 한두 명의 사람이 아니라 집단으로서 다수의 사람에게 동시에 발생하는 질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와 함께, 그리고 당연한 귀결로 팬데믹은 공통된 원인에 의해 생기는 질병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공통적 원인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에 관련되는데, 대표적으로 공기나 물, 음식 혹은 천체의 영향 등이다. 그런데 팬데믹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행병으로 사용된 용어는 ‘epidemic’이다. 특히 『히포크라테스 전집』에는 『유행병』이란 제목의 글이 7편 존재한다.『히포크라테스 전집』에 실린 글이 전부 60여 편 정도 되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많은 분량이 유행병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행병』은 그 구성이나 내용에서 다른 글들과는 상당히 차별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먼저 『유행병』은 환자의 증례집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각 환자의 증례는 환자의 실명과 거주지역을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이어서 환자의 증상이 기술된다. 환자들은 대부분 발열을 호소하여 감염성 질환임을 짐작케 한다. 『유행병』에는 또 다른 특징도 있다. 어쩌면 증례들을 모았다는 사실보다 더욱『유행병』의 특징을 이루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개별 환자 증례를 기술하기 전에 ‘constitution’이란 부분이 먼저 온다는 점이다. ‘constitution’은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개념인데 어떤 지역 특유의 기후 조건을 계절에 따라 설명한 것이다. 이는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앓는 질병이 그 지역의 기후적 특징의 영향을 받으며 그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결국 유행병(epidemic)은 다수의 사람에게 동일하게 미치는 자연적 조건이나 환경에 의해 발생한 병이고, 그에 대한 서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여기에 서술된 각 환자는 발열을 주증상으로 하는 일종의 감염성 질환에 걸린 것으로 보이지만 전염의 개념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많은 사람이 같은 질병에 걸리는 이유는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시적 차원의 요인, 즉 기후나 천체의 변화와 같은 것에 공통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됨으로써 다수의 사람이 동일한 질병에 걸린다는 관념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질병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된다는 개념은 시대적으로 나중에 등장하며 이를 전염설 혹은 접촉설(contagionism)이라 한다. 어떠한 매개체를 통해 직접 질병이 전파된다는 생각은 이미 2세기의 의학자 갈레노스가 질병의 ‘씨(sperma)’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갈레노스는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를 휩쓸었던 대역병에 대해 기술하며 그 원인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접촉을 통해 감염되는 질병에 대한 이론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제시한 사람은 16세기의 의학자 프라카스토로(Girolamo Fracastoro, 1476-1553)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전염과 전염병, 그리고 치료에 관하여 De contagione et contagionis morbis et curatione』(1546)에서 살아있는 생명체가 사람으로 질병을 옮길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의 의학 이론은 전체적으로 전통적인 ‘감응설(sympathy)’에 근거해 있었다는 점에서 시대적 한계는 있었으나 그의 이러한 생각은 충분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사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질병을 옮기는 매개체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염설을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는 다수 환자의 동시적 발병을 동일하게 노출된 환경적 요인에서 찾는 것이 더욱 합리적 추론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발병의 범위가 넓을수록 더욱 거시적인 공통요인을 찾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14세기에 유행한 페스트이다. 이때 유행한 페스트는 2년 남짓한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전역을 초토화하였고, 희생된 사람만 당시 총인구의 절반에서 삼 분의 일에 이른다고 본다. 이처럼 광범위한 발병을 설명하기 위해 천체의 이변이 동원되었다. 당시 파리의과대학의 교수들은 페스트 발병 몇 해 전에 각자 자기 궤도를 돌던 행성들이 만나 일렬로 정렬하게 되는 행성들의 합(合)이 일어났고, 이 이례적인 천체 현상이 지상에 영향을 미쳐 유럽 전역에 페스트가 발병했다고 설명했다. 이후에도 감염병의 원인을 환경적 요인으로 보는 관점은 19세기 말 세균설이 등장할 때까지 의학계의 지배적인 관점이었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공기이다. 공기는 모든 사람이 마시는 것이므로 사람들이 동시에 ‘나쁜 공기’를 들여 마시면 동일한 질병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나쁜 공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공기에 포함된 해로운 성분을 서양에서는 ‘미아즈마(miasma)'라 불렀다. 미아즈마의 기원은 다양하다. 땅에서 올라올 수도 있고, 늪과 같이 고인 물이 부패하면서 생겨날 수도 있고, 또한 시체가 부패하면서 생겨나기도 한다. 실제로 미아즈마는 역병의 집단적 발병 양상을 잘 설명할 수 있는 효과적인 개념이었다. 그리고 미아즈마 이론에 기초한 19세기 유럽의 위생개혁운동도 충분히 긍정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거리에 방치된 오물이나 부패물에서 미아즈마가 발생하므로 이를 제거하여 청결한 환경을 확보하면 질병 예방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실적 효용성으로 인해 19세기 세균설이 등장한 이후에도 미아즈마 이론은 상당 기간 세균설과 경쟁을 하며 생명을 유지했다. 보통은 세균설의 승리를 돋보이게 하려고 환경을 중시하는 미아스마설과의 대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오염된 환경이 감염의 온상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므로 이들을 너무 대립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동아시아에서는 과거 감염병을 어떻게 보았을까? 먼저 서양의 유행병에 해당하는 용어는 ‘역병(疫病)’이다. 여기서 ‘역(疫)’이란 글자는 병들어 눕는다, 혹은 기댄다는 의미의 ‘疒(녁)’자와 ‘役’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글자이다. ‘疒(녁)’은 질병과 관련된 모든 글자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부수로 사용되므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역(役)’이란 글자가 고대 동아시아에서 유행병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역(役)’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아시아 전근대 시기에 국가가 백성들에게 강제로 부과하는 의무를 말한다. 다만 이 의무는 세금과 같이 현물이나 돈을 납부하는 의무가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다. 대표적으로 군역(軍役)과 요역(徭役)이 있는데 군역은 군인으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국민의 의무이다. 다음으로 요역은 현대국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백성들이 강제적으로 국가의 토목사업에 동원되어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役)의 개념이 유행병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가장 오래된 한자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온 백성이 다 병에 걸리는 것을 ‘역’이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역’이 모든 백성에게 부과되는 피할 수 없는 의무인 것처럼 모든 사람이 걸리는 질병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질병을 앓는 대상의 범위를 의미하는 말로 ‘역’이란 글자가 취해진 것이다. 다수에게 생기는 질병이란 의미라는 점을 생각하면 위에서 설명한 ‘epidemic’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또 다른 책인 『석명(釋名)』의 해석에 따르면 귀신이 행역(行役), 즉 여기저기 다니면서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 ‘역’이란 글자를 썼다고 설명한다. 이 경우는 대상의 범위보다는 질병의 발병 양상에 초점을 맞춰 ‘역’이라는 글자를 해석했다. 질병이 이곳저곳 장소를 이동하며 발생한다는 유행병(流行病)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한자학의 대석학인 일본의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선생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는 군역을 수행하기 위해 멀리 변경으로 갔는데, 이처럼 질병이 멀리까지 간다는 의미에서 ‘역’이란 글자를 취했다고 해석했다. 시라카와 선생의 해석은 ‘역(役)’이라는 글자가 원래 ‘人’ + ‘殳’로 사람이 창을 들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형상으로 ‘역’이 군역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멀리 간다는 의미 이외에도 군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것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발병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감염병과 관련해 사용하는 여러 용어 안에는 과거로부터 인류가 감염병을 겪으며 그 질병의 특징에 대해 생각했던 내용이 잘 담겨있다. 이것은 사실 감염병과 관련된 용어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의학의 모든 용어는 특정한 질병이나 의학적 관념에 대한 선인들의 생각들이 축적되어 형성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기계적으로 별다른 생각 없이 사용하는 용어들의 기원을 따져보는 것은 의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3월 24일이 무슨 날일까? 바로 세계 결핵의 날(World Tuberculosis Day)이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라는 감염병이 전 세계를 덮치며 우리 생활은 180도 변화했였고, 아직까지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온 의학을 통해 인류는 코로나바이러스로부터 힘겨운 사투를 이겨나가며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과거 인류에게는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감염병이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결핵이다. 유명한 명화 속에서 결핵으로 인한 가슴 아픈 사연을 찾을 수 있다. 먼저 르네상스 시대를 화려하게 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작품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피렌체에서 역사나 신화 작품과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그의 작품 중 우리에게 친숙한 ‘비너스의 탄생’은 르네상스 초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리스신화 속에서 비너스의 탄생과정에 대해 알아보자. 하늘의 신 우라노스는 자신의 자식들을 지하에 가두었는데, 막내인 크로노스가 우라노스의 음경을 낫으로 잘라 거세를 하였다. 우라노스의 생식기는 바다에 떨어져 거품이 되어 떠도는데,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거품을 섬으로 밀어내었다. 그러자 거품 속에서 아름다운 여신이 나타나는데, 바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다. 계절을 주관하는 여신들이 아프로디테를 단장해주고 거품(aphros)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아프로디테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는 그리스어 이름으로 중세 이후에는 라틴어로 비너스(Venus)라고 불리게 된다. 비너스에 대한 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보티첼리의 작품을 떠올리는데. 이 작품이 르네상스 시대 최초의 누드화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여신을 그리더라도 누드로 그릴 수는 없었는데 보티첼리는 여신의 모습을 빌려 여인의 아름다운 육체를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당시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다. 이 작품 속 비너스의 왼쪽에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Zephyrus)와 요정 클로리스(Chloris)가, 오른쪽에는 계절의 여신 호라이(Horai)가 꽃무늬가 가득한 옷을 건네며 환영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전체적인 배경은 다른 작가의 비너스의 탄생과 비슷하지만 보티첼리의 작품 속의 비너스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여신이지만 부끄러운 듯 머리카락과 손으로 몸을 가리며 정숙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리고 어딘가 아픈 듯 왼쪽 어깨가 축 쳐져 있고, 미모에 대한 자신감을 보이기는커녕 어디가 아픈 듯 멍한 표정을 하고 있다. 보티첼리가 비너스를 이렇게 표현한 것에는 그의 슬픈 러브스토리가 숨어있다. 작품 속 비너스의 모델은 바로 피렌체 최고의 미인인 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Vespucci, 1453~1476, 아래 시모네타)로, 보티첼리는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24살에 결핵으로 죽었는데, 보티첼리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수많은 작품 속에 그녀를 그려 넣었다. 이 작품 속 아프로디테의 마르고 긴 체형, 창백한 얼굴, 비정상적으로 가파른 어깨선은 시모네타가 심한 결핵환자임을 의심하게 한다. 그렇다면 시모네타는 정말로 결핵이였을까? 결핵(tuberculosis)은 결핵균에 의해 생기는 감염성 질환으로 약 85%는 폐에서 발병하기 때문에 흔히 폐결핵을 말한다. 주로 기침, 발열, 식욕부진, 체중 감소와 같은 전신 증상이 나타난다. 작품 속 비너스의 왼쪽의 어깨가 오른쪽에 비해 심하게 쳐져 있는데, 실제로 결핵으로 인해 폐가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기관에서 양쪽 폐를 이어주는 이동 통로인 기관지(bronchus)는 기관(trachea)의 말단에서 오른쪽은 3개, 왼쪽은 2개로 나누어진다. 오른쪽기관지는 짧고(2.5㎝) 굵으며 벌어지는 각도가 정중선에서 20∼40°인데 비해 왼쪽기관지는 길고(5㎝) 가늘며 벌어지는 각도도 40∼60°나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이물질을 잘못 삼켜서 기도로 넘어가면 왼쪽기관지보다 오른쪽기관지에 더 잘 걸리게 된다. 반대로 왼쪽기관지는 기침을 할 때 객담이나 가래가 기관으로 올라가서 배출되기 어렵다. 따라서 기관지결핵은 가래를 덜 뱉는 20대 여성에서 더 많이 생기며 특히 가래를 배출하기 힘든 왼쪽기관지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였을 때, 작품 속 아프로디테는 폐결핵보다는 왼쪽의 기관지결핵이 더 의심되기도 한다. 또한, 결핵 등의 호흡기질환에 의해 기침을 심하게 할 경우, 갈비뼈가 금이 가거나 골절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 주로 6번째 갈비뼈의 측면에서 골절이 가장 흔하며, 갈비뼈와 복장뼈 사이에 있는 갈비뼈연골에 염증으로 통증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보티첼리의 작품 속 비너스 또한 골절이나 염증에 의한 통증으로 왼쪽 가슴 부위를 웅크린 것은 아닐까 하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민족의 비통한 심정을 담은 이상화(1901~1943)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가 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추운 겨울도 시간이 지나면 곧 따뜻한 봄이 온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다. 보티첼리 역시 시모네타를 향한 마음을 자신의 그림 속에 표현하며 슬픔을 이겨내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최고의 작품은 단연 <프리마베라>이다. <프리마베라>는 이탈리아어로 봄 또는 청춘이라는 의미이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의 역사를 저술한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1550년경 메디치 가의 별장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꽃의 요정 클로리스를 잡고 있다. 클로리스는 제피로스에 의해 꽃의 여신 플로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강제적인 만남에 제피로스는 플로라를 꽃의 여신으로 만들어주며 500여 종의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 찬 정원을 선물로 준다. 그림의 중간에는 임신한 비너스와 눈을 가리고 화살을 쏘고 있는 큐피트가 보인다. 그리고 왼쪽에는 순결, 사랑,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삼미신이 춤을 추고 있고, 그 옆에 헤르메스가 있다. 비너스가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기에 메디치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보티첼리가 메디치가를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해석된다. 특히 그림 속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오렌지 나무 역시 이러한 해석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준다. 하지만 의학 혹은 해부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이 그림 속의 비너스 양쪽의 나뭇가지에서 허파(폐, lung)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상업의 신인 헤르메스와 서풍의 신 제피로스를 통해 그림을 의뢰한 메디치 가문이 상업적, 정치적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이라는 의지를 넣었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보티첼리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앞서 말한 대로 보티첼리는 사랑하는 시모네타를 그리워하며 <봄> 속의 플로라를 시모네타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아마 여위고 홍조를 띤 플로라의 얼굴을 그리면서 결핵과 같은 폐질환을 원망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명성에 걸맞은 예술가답게 그 아픈 마음을 작품으로 승화하지 않았을까 한다. 보티첼리는 이 외에도 많은 작품을 그렸는데, 그 중 시모네타를 모델로 그린 것으로 알려진 <비너스와 마르스>가 있다. 이 그림은 비너스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와 결혼한 후에 전쟁의 신 ‘마르스’와 사랑을 나누는 부적절한 사이를 표현하였다. 이 그림 속의 비너스의 긴 목과 쳐진 어깨는 이 그림의 모델 역시 <비너스의 탄생>속의 그녀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아프로디테의 불륜과 함께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를 표현한 그림으로, 육체적 관계 후에도 정서적 교감을 원하는 여성과 그렇지 못하는 남자를 보여주고 있다. 신혼부부에게 종종 이 그림을 선물로 주곤 하는데, 이는 서로에게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다. 보티첼리는 결핵으로 인해 시모네타를 잃은 슬픔을 뒤로하고 예술 작품을 통해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지켜가며 사랑에 대한 경고까지 하였다. 그 끝내 그는 시모네타의 발끝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과 함께 6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보티첼리에게 있어 시모네타는 가슴(폐)에 묻힌 사랑일 뿐 아니라 뮤즈였던 것이다.
아뉴스 데이(agnus dei)는 라틴어로 ‘신의 어린 양(羊)’이란 뜻이다. 어린 양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신에게 바쳐진 대표적인 희생제물(贖罪羊)로,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영화의 원제 는 ‘죄 없는 사람들’을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반 년이 지난 1945년 12월 폴란드의 어느 수녀원. 아름답고도 간절한 성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린다. 곧 한 수녀가 작정이라도 한 듯 망가진 문을 열고 마을로 내려간다. 거리에서 만난 고아들에게 ‘폴란드의사도 아니고 러시아 의사도 아닌’ 의사를 찾는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수녀를 프랑스 야전병원으로 안내한다. 병원에 들어간 수녀, 도움의 손길을 찾으려 하지만 다들 너무 바빠 아무도 수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다 여의사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다가가 도움을 부탁한다. 하지만 의사는 ‘폴란드인은 폴란드 적십자병원으로 가라’며 매정하게 수녀를 내쫓는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수술을 끝낸 후 한숨을 돌리던 여의사는 눈 속에서 미동도 않고 간절히 기도하는 수녀를 본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기도가 통했을까? 프랑스 여의사 마틸드는 수녀원으로 간다. 수녀원에는 난산(難産)으로 탈진 상태인 산모가 있다. 마틸드는 급히 산모의 배를 갈라 두 목숨을 구한다. 그런데 수녀원장은 그녀에게 고마워하긴커녕 외부인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뭔가 자꾸 감추려 한다. 알고 보니 이 수녀원에는 임신한 수녀가 7명이나 있다. 대부분은 만삭의 몸이고(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것이다) 이틀 전에는 한 수녀가 아이를 낳다가 목숨까지 잃었다. 사태가 이 지경인 데도 수녀원장은 이 일을 철저히 은폐하려 한다.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마틸드, 하지만 도움을 거절하며 신의 뜻에 따르겠다는 수녀원장, 이제 이 이야기는 어떻게 풀려나갈까?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서쪽은 독일이, 동쪽은 소련이 침공해 들어와 폴란드는 동서로 쪼개져 점령당했다. 하지만 전쟁 말미에는 소련이 나치를 몰아내고 서 폴란드까지 장악했다. 그러는 사이 수녀원은 독일군과 소련군이 번갈아 약탈했다. 수녀들은 점령군에게 성폭력을 당했고, 일부는 임신까지 했다. 194년 봄, 전선에서 총성은 멎었지만 겨울이 오면서 수녀원에서는 새로운 전쟁, 즉 출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도움을 구할 수는 없었다. 폴란드인들에게 알리면 더러운 소련군의 씨를 잉태했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고, 점령군에게 알리면 자신들의 폭력을 은폐하려 무슨 일을 벌일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3자인 프랑스 여의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마틸드가 수녀원에 머물던 어느 날, 소련군들이 수녀원에 들이닥친다. 수녀들은 두려움에 떨며 아무런 저항도 못하지만 마틸드가 용감하게 나선다. 그리고 수녀원에 ‘발진 티푸스가 돌고 있다’고 말한다. 소련군은 걸음아 날 살려라며 달아난다. 발진티푸스 혹은 티푸스(epidemic typhus, typhus fever)는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그래서 장티푸스(typhoid fever)와 헷갈리기도 하는데 전혀 다른 병이다. 지금으로 치면 코로나19는 물론이고 에볼라만큼 무서운 병이었다. 오랜 세월 인류를 괴롭힌 발진 티푸스는 이(爾)가 옮기는 세균인 리케챠(rickettsia)가 일으키는 감염병이다. 2주의 잠복기가 지나면 두통, 몸살, 오한과 고열이 나타나고 곧이어 온 몸에 작은 종기처럼 보이는 발진(發疹)이 돋고 환자가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면 발진+티푸스(tuphos 제정신이 아니라는 그리스어)에 걸린 것이다. 병이 진행하면 온몸이 썩어 들어가고, 끔찍한 고통이 찾아오고, 혼수상태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치사율은 20%에 이르고 치료할 수도 없었다. 전염력은 엄청나게 높았다. 환자 한 사람이 발견된다면 이미 주변에 병이 다 퍼진 상태였다. 모두 불태우고 달아나도 이미 때는 늦었다. 발진티푸스는 오래된 병이다. 15세기부터 유럽에 등장해 전쟁이나 기근으로 난민이나 포로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 방치되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갈아 입을 깨끗한 옷이 없으며 이가 힘을 얻고 티푸스도 번성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에서 3,000만 명이 감염되어 300만 명이 죽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포로수용소, 난민수용소, 감옥 등에서 수 백 만 명이 티푸스로 목숨을 잃었다. 특히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1941~1942)에서만 45만 명이 굶주림과 티푸스로 죽은 참사가 있었다. 그래서 제아무리 흉악무도한 소련군이라도 티푸스란 소리를 들으면 기겁을 하는 것이다. 티푸스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놀라운 기지를 발휘한 의사 마틸드 볼리외(마들렌느 뽈리악(Madeleine Jeanne Marie Pauliac; 1912~1946),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전후에는 바르샤바의 프랑스 적십자 야전병원에서 일했다. 이 영화는 그녀가 겪은 사실을 토대로 만들었다. 영화의 배경은 1945년 12월이었고, 마틸드는 이듬 해 2월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슬프고도 놀라운 이 이야기는 70년 후에 발견된 그녀의 일기장을 통해 알려졌다. 마틸드가 전후의 바르샤바에서 활약했다면 전쟁 중에 폴란드 남동부 로즈바도프 (Rozwadow)에서 활약한 의사들도 있다. 지역 개원의인 유게니우스 라조프스키(Eugeniusz Lazowski) 와 스태니슬라브 마툴레비치(Stanislav Matulewicz)는 수용소로 끌려가 비참하게 죽을 처지인 친구를 구하기 위해 티푸스를 이용한다. 티푸스의 진단법은 바일-펠릭스 검사(Weil–Felix test)이다. 이 검사는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환자의 혈청을 프로테우스균(proteus)과 반응시켜 나오는 응집(agglutination)반응으로 확인한다. 발진티푸스를 일으키는 리케차의 일부 종류와 일부 프로테우스균의 항원이 같은 성질을 이용한다. 그래서 프로테우스균에 감염되면 티푸스 ‘위양성’ 반응이 나온다. 임상적으로 프로테우스 감염은 의미가 없기에 의사들은 신경도 안 쓴다. 이 발칙한 의사들은 프로테우스균을 친구에게 주사한 후 피를 뽑아 독일로 보냈다. 당연히 ‘티푸스 양성 반응’이 나왔다. 덕분에 친구는 졸지에 환자가 되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았다. 성공을 예감한 두 의사는 주변의 유대인들에게도 주사를 놓아 ‘확진자’를 점점 늘려 나갔다. 나중에는 확진자가 유대인들에게만 보인다면 집단학살을 당할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해 폴란드인들도 확진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티푸스가 기승을 부렸지만 독일 당국은 감염이 두려워 제대로 된 현장 조사도 하지 않고 이 지역을 봉쇄했다. 단 한 사람도 이 지역에 들어가고 나가지 못하게 한 덕분에 수용소에 끌려갈 8,000명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건졌다. 이 정도면 ‘제2의 쉰들러’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티푸스의 역사에서 의사들의 활약이 언제나 해피엔딩인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 연구자들은 학문의 제단에 바쳐진 희생양이 되었다. 1909년에 튀니지 파스퇴르연구소의 샤를 니콜(Charles Nicolle)은 이(爾)를 통해 티푸스가 옮는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다. 1916년에는 독일에서 일하던 브라질 병리학자 리마(Henrique da Rocha Lima)가 처음으로 병원체를 분리했다. 리마는 신종 병원체의 이름에 자신 대신 체코의 병리학자인 스태니슬라우스 폰 프로바제크(Stanislaus von Prowazek, 아래 프로바제크)의 이름을 넣어 리케차 프로바제키(Rickettsia prowazekii)로 명명했다. 두 사람은 함부르크의 교도소에서 티푸스를 연구하던 중에 둘 다 티푸스에 걸렸고 프로바제크는 1915년에 목숨을 잃었다. 리마는 그의 희생을 기린 것이다. 리케차라는 이름 역시 이를 연구하다 죽은 미국 병리학자의 이름에서 따왔다. 리케츠(Howard Taylor Ricketts)는 미국 몬태나 주에서 진드기가 로키산홍반열(RMSF)을 옮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진드기 속의 리케차가 감염원이다. 리케츠 역시 1910년에 멕시코시티에서 티푸스로 죽었다. 로키산홍반열의 병원체는 그를 기려 리케차 리케치(Rickettsia rickettsii)로 불린다. 이처럼 끔찍한 티푸스였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돌파구가 나온다. 살충제 DDT 덕분이다. 강력한 살충제는 리케챠를 옮기는 이를 죽여서 티푸스를 예방했다. 625전쟁 중에는 DDT를 쓸 수 있었기에 우리나라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록 필름에서 포로나 난민에게 뿌리는 하얀 분말이 바로 DDT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중에는 리케차를 직접 공격하는 클로람페니콜이나 테트라싸이클린 같은 항생제도 나와 지금은 티푸스는 치료할 수 있는 병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는 이제 거의 사라진 병이다. 오늘날 우리가 강의실, 실험실, 병원에서 너무나도 편하게 이용하는 이런저런 검사나 치료법에도 이렇게 많은 사연들이 있다. 숨막히는 강의나 시험으로 점철되는 의대생의 시간들이지만 이런 영화가, 이야기가 잠깐의 휴식과 위안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