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The Korean Society of
Medical Education

Issue vol.4 2023-11-07 611

박승만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인물사를 통한 의학전문직업성 함양: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치유자리더십 인물탐구

1. 과목 소개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서는 예과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기 동안 매주 2시간, 15주간 ‘치유자리더십’이라는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전체 교육 과정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전반기 7주 동안은 질병, 고통, 치유, 치유자의 의미를 확인하고, 치유와 사회정의의 관계와 치유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돌아보며, 후반기 6주 동안 진행되는 인물탐구 과정에서는 구체적인 인물의 사례를 살펴본다.

다시 말해 전반기 수업이 의료 전반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의료인이 갖추어야 할 의학전문직업성의 여러 요소를 제시한다면, 후반기 인물탐구 과정에서는 개별 인물의 삶을 통해 여러 사회적, 개인적 맥락에서 의학전문직업성이 탐색되고 구현되는 과정을 살핀다. 이 글에서는 후반기 인물탐구 과정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려 한다.


2. 수업 목표


치유자리더십은 상기한 바와 같이 의과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신입생에게, 환자와 질병에 대한 전인적인 이해와 이를 실천한 실제 인물의 예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의업에 처음 발을 딛는 학습자에게 의료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의사상을 구상하도록 독려한다.


3. 수업성과


인물탐구 과정의 학습 성과는 다음과 같다.

(1) 한 인물의 생애를 탐구하여, 개인적, 사회적 성장 배경 및 업적을 찾아내고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찾아낼 수 있다.

(2) 대상 인물의 생애에서 의료인의 사회적 역할 및 책임을 구체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다.

(3) 자신이 미래에 되고자 하는 의사상을 구체화할 수 있다.


4. 개발 과정


인물사는 역사학의 전통적인 연구 방법론 가운데 하나이다.

고대의 『사기』(史記)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비롯하여 이후의 많은 역사서는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역사가 수많은 전기의 정수로 이루어진다는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말은 인물사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인물사의 가치를 낮게 보던 이들도 없지 않다.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로 대표되는 실증주의 역사가, 그리고 개인보다는 구조를 강조하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와 아날학파 역사가 등에게 인물사는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인 기록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후 개인의 삶을 다시금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미시사의 등장과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을 강조하는 인류학의 영향, 여기에 공적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이들의 삶에 주목하는 탈식민주의 역사학, 페미니스트 역사학 등의 부상과 함께 이른바 ‘전기적 전환’(biographical turn)이 일어나면서, 인물사는 유력한 역사 연구 방법론으로 다시 조명받고 있다.

한편, 의학교육에서 인물사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활용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존스홉킨스대학교의 윌리엄 오슬러(William Osler, 1849-1919)와 같은 이들은 의학교육이 과학적인 측면에만 집중할 경우 ‘좋은 의사’가 아닌 ‘의료 기술자’를 양성할 뿐이라 우려했다. 그가 내어놓은 대안은 인물사를 통해 바람직한 의사상을 제시하는 이른바 ‘오슬러 방법’(Oslerian method)이었다. 오슬러는 토머스 리너커(Thomas Linacre, c. 1460-1524),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 토머스 시드넘(Thomas Sydenham, 1624-1689) 등의 삶으로부터 “오래된, 하지만 여전히 생생하고 새로운 이상”을 길어 올릴 수 있으며, 학생에게 이를 제시함으로써 좋은 의사를 양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의 의학 교육 또는 의학사 교육에서 인물사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물사의 강조가 자칫 ‘휘그주의적’(Whiggish) 의학사로 이어질 가능성 탓이다. 오슬러와 같이 여러 위대한 의사, 특히 백인 남성 의사의 삶에 집중하는 방식의 역사 서술과 교육은 자칫 의학사의 주체를 기득권으로 한정하고, 의학사를 진보의 연속으로 기술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의학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가능성이 크다. 터스키기 매독 실험 사건이나 731부대의 생체 실험의 예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의학사는 진보의 역사가 아니다. 더 나아가, ‘아래로부터의 역사’에 주목한 이들이 보여준 것처럼, 의학사의 행위자 역시 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의사가 아닌 의료인이나 넓은 의미의 치유자, 더 나아가 환자 모두가 의학과 상호작용하는 적극적인 주체이다.

또 다른 이유는 오슬러 방법이 맥락을 사상(捨象)하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오래된, 하지만 여전히 생생하고 새로운 이상”이라는 문장에서도 보이듯, 오슬러는 여러 인물의 삶에서 맥락을 초월한 항구적인 가치를 길어 올리고자 했다. 이러한 방식은 의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선명하게 제시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학습자가 이러한 덕목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기 힘들다는 단점도 있다. 이는 상황학습과 경험학습을 강조하는 의학 교육 이론의 견지에서 보았을 때, 적지 않은 한계이다. 롤 모델링을 활용한 교수법이 다양한 사회적 맥락을 지닌 현대 사회에 걸맞지 않다는 비판은 오슬러 방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다면 인물사는 폐기되어야 할 방법인가? 그렇지 않다.

오슬러 방법은 인물사를 활용하는 유일한 방식이 아니다. 다음의 두 가지 대안을 통해 오슬러 방법의 한계를 극복한다면, 인물사는 여전히 유용한 방법론일 수 있다. 하나는 사회적 맥락의 강조이다. 다시 말해 오슬러 방법에서처럼 인물로부터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를 읽어내기보다는, 인물 각각이 구체적인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루돌프 피르호(Rudolf Virchow, 1821-1902)의 삶 속에서 단순히 사회를 향한 관심이라는 덕목을 강조하기보다는 피르호가 어떻게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social determinants of health)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강조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입체적이고 다양한 인물의 선정이다. 일부 위대한 의사, 주로 백인 남성 의사에 집중하는 오슬러 방법은 의학사의 다양한 주체를 반영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는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행위자, 이를테면 여성 의사나 소수 인종의 의사, 또는 의사가 아닌 의료인을 인물사의 대상으로 선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물의 공과(功過)를 모두 드러내어야 한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인물의 위대함에만 집중하는 오슬러 방법은 자칫 의학의 역사가 진보의 역사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일견 인물의 한계와 단점을 드러내는 일은 의학전문직업성의 함양에 해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현실의 복잡다단함과 행위의 무거움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치유자리더십 인물탐구 교육 과정을 새롭게 개발하였다. 먼저 수업의 응집성을 위해 여러 인물을 무작위로 배치하기보다는, 주마다 하나의 주제를 할당하고 주제별로 3명 또는 4명의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먼저 인물탐구 1주차 전인치료에서는 환자라는 존재를 생물학적, 정신적, 사회적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바라본 이들, 2주차 사회의학에서는 건강의 결정 요인을 사회로 확장한 이들, 3주차 의학의 지평에서는 질병을 넘어 건강 자체, 죽음, 발병 가능성을 의학 연구의 대상으로 새롭게 조명한 이들, 4주차 한계와 도전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또는 흑인, 약소 국민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했던 차별을 극복한 이들, 5주차 국제보건에서는 나라의 국경을 넘어 세계의 건강 문제에 헌신했던 이들을 다루기로 하였다.

주제를 선정한 다음에는 아래의 세 가지를 고려하여 인물을 선정했다.

첫째, 시대를 고려하여 히포크라테스를 제외한 모든 이를 근현대의 인물로 선택했다.

보통의 인물사 수업은 대부분 전근대의 인물을 활용한다. 이미 역사적 평가가 어느 정도 완료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불필요한 논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맥락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인물을 선택할 경우, 학생이 시간적 거리감을 느낄 뿐 아니라 인물의 삶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상황에 적용하기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따라 치유자리더십 인물탐구에서는 동시대의 인물 또는 가까운 과거의 인물에게 집중하였다. 물론 여전히 평가가 진행 중인 인물이 대부분이라 안전하지 못한 선택일 수도 있으나, 동시대성이 주는 활력과 이에 따른 교육 효과가 더 크다고 판단하였다.

둘째, 성비를 고려한 이유는 오슬러 방법이 그러하듯이 인물사가 대개 남성을 위주로 교육되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가 자신이 사회의 젠더 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여성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에 여성 입학이 허가된 것은 1945년의 일이다. 그러나 현실의 젠더 불평등을 수업에서 반복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임상, 연구, 사회 활동 전면에서 활약한 여성을 적극적으로 다룸으로써,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총 17명의 인물 가운데 절반이 넘는 10명을 여성으로 선정하였다.

마지막은 인물의 범위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최근의 의학사는 치유자의 범위를 의사로 한정하지 않는다. 의사가 아닌 이들도 광의의 치유는 물론이거니와, 의사의 일이라 생각되는 협의의 치료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의사뿐 아니라 비의사 의료인, 또는 비의사 연구자를 수업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현재는 17명의 인물 가운데 BRCA1 유전자와 유방암 발병의 관계를 규명한 메리 클레어 킹(Mary Claire King, 1946-)이 여기에 해당한다. 향후 인물을 추가하고 변경하면서 이 부분을 좀 더 보강할 계획이다.


5. 수업 진행


학습자의 능동적인 참여를 위해 각 인물에 대한 조별 발표를 중심으로 수업을 설계하였다. 교수자는 조별 발표에 대한 보충 설명을 제시하고, 각 주의 주제에 관련된 인문사회의학 개념을 강의하였다. 먼저 조별 발표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모두 열일곱 명으로, 이 가운데 함께 활동했던 부부와 모녀를 하나로 묶으면 모두 열다섯 조가 발표할 분량이 된다. 학습자는 6-7명이 한 조를 이루어 이들 인물 가운데 하나를 자율적으로 선택해 조별 발표를 진행하였다. 발표는 한 주당 세 조씩 이루어지며, 각 주에 발표되는 3-4명의 인물은 하나의 주제로 포괄된다. 즉, 총 다섯 가지 주제에 대해, 한 주제 당 세 조의 발표가 이루어졌다.

발표에 필요한 자료는 교수자가 미리 제시하였다. 자료는 크게 세 종류, 인물이 직접 쓴 일차 자료와 인물의 삶을 추린 짧은 전기, 그리고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담은 연구 논문으로 구성된다. 일부 인물은 테드(TED)나 영화 같은 영상 자료를 제시하기도 했다. 다만 이렇게 교수자가 자료를 제시할 경우 인물에 관한 선입견을 형성할 우려가 있어, 이를 막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였다. 먼저 전기와 연구 논문의 경우 당대의 시대 상황과 인물의 과오를 고루 담은 것으로 선정하였으며, 더 나아가 탐구 대상이 작성한 일차 문헌을 제시함으로써 학습자 스스로 인물을 판단할 수 있게 하였다.

매시간 세 조의 인물 발표가 끝난 뒤, 교수자는 주별 주제에 따른 인문사회의학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를테면 전인치료를 다루는 인물탐구 1주 차에서는 건강과 질병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법인 생의학 모형(biomedical model)과 생정신사회 모형(biopsychosocial model)을 살펴보고, 전자의 한계와 후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각 조가 발표한 구체적인 사례를 개념으로 정리하여, 의학전문직업성의 기초가 되는 의학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려는 의도이다. 각 주의 주제와 선정 인물, 개념은 다음과 같다.


 

다섯 번의 조별 발표 이후에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글쓰기 방법을 교수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개별 보고서의 작성 요령을 강의하는 시간이지만, 넓게는 인문학적 글쓰기의 기초를 교육하는 시간에 해당한다. 인물에 관한 문헌 정보를 검색하고, 이렇게 파악한 인물의 삶에서 나름의 문제의식을 길어 올리며, 이를 중심으로 인물의 삶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재구성하고 평가하는 방법, 그리고 더 나아가 서론과 본론, 결론을 구성하는 방법과 완성된 글을 퇴고하는 방법 등을 종합적으로 교수했다.

마지막으로 평가는 수업 시간에 진행되는 조별 발표와 5,000자 분량으로 작성된 조별 보고서, 그리고 3,000자 분량으로 작성된 개별 보고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조별 보고서는 발표 내용을 정리하고, 이에 관한 교수자의 보충 설명을 반영하여 작성하도록 지도하였다. 또한, 개별 보고서는 조별 발표에서 다루지 않았던 인물을 주제로, 자신이 미래에 되고자 하는 의사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도록 하였다.


사례: 메리 클레어 킹

새로운 교육 방법론의 실행을 메리 클레어 킹이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3주차에 다루는 인물인 킹은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유전학을 전공한 유전학자이다. 유방암의 발병에 영향을 미치는 BRCA1 유전자를 최초로 발견하였으며, 다양한 질병과 유전자의 연관성을 연구하였다. 킹의 연구는 이후 BRCA1 유전자 변이 검사를 일반적인 건강검진 항목에 포함해야 하는지, BRCA1 유전자 변이가 발견될 경우 예방적 유방 및 난소 절제술을 시행해야 하는지 등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으로 이어졌으며, 킹 역시 직접 논쟁에 참여하였다.

킹은 또한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시기부터 사회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유전학자로 자리 잡은 이후에도 꾸준히 사회 현안에 대한 발언과 개입을 이어나갔다. 특히 1984년부터는 인권 단체 ‘마요 광장의 할머니’(Abuelas de Plaza de Mayo)와 협력하며, 미토콘드리아 DNA와 사람백혈구항원(human leukocyte antigen, HLA) 분석을 통해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이 벌어지는 동안 아르헨티나 군부에 의해 납치되어 실종된 아동의 신원을 파악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킹의 사례를 통해 유도한 학습 효과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비판적 탐구 정신의 강조이다. 킹이 본격적으로 유전자 연구에 착수한 197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암과 유전자의 연관성은 분명치 않았다. 오히려 대다수는 이미 많은 성과를 내어놓은 미생물학의 이론을 바탕으로, 암을 유발하는 병원체를 찾는 데 집중했다. 킹은 이러한 상식에 도전하여 유전자 변이에서 비롯한 질병의 가능성에 주목함으로써, 의학의 연구 영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의학의 지평을 넓힌 킹의 삶을 통해, 학생들이 오늘날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태도를 함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두 번째는 기술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성찰이다. 킹이 발전시킨 유전자 분석 기술의 함의는 단순히 생물학적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는 ‘마요 광장의 할머니’와의 협력이 보여주듯 사회적 고통을 덜어주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으며, 유전자 변이 검사를 둘러싼 논쟁이 보여주듯 사회에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킹은 유전자 검사를 확대함으로써 유방암과 난소암 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어떤 이들은 유전자 검사의 확대가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했다. 질병 관리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불필요한 검사를 시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생명공학 기업의 이익에 복무하리라는 지적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학생들이 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좋은 소재에 해당한다.

의도한 학습 효과를 충실히 실현하기 위해, 세 가지 장치가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하나는 균형 잡힌 읽을거리의 선정이다. 킹이 BRCA1 유전자의 발견 과정과 아르헨티나에서의 활동 각각에 대해 직접 서술한 두 편의 글과 킹의 생애를 3쪽 분량으로 서술한 간단한 전기, 그리고 유전자 검사의 확대를 둘러싼 찬반 양측 각각의 글을 수업에 앞서 자료실에 올려두었다. 이를 통해 킹이 어떠한 맥락 속에서 유전자 연구와 사회 활동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또 유전자 검사의 확대가 어떠한 사회적 영향을 가져올지 폭넓게 읽어보게 하였다. 이에 더해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킹과 실제 유방암 환자의 일화를 다룬 스티븐 번스타인 감독의 영화, ‘애니를 위하여’(2013)를 추가로 제시하였다.

두 번째는 발표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학습자와 교수자의 상호작용은 역동적인 과정이다. 같은 인물에 대한 발표라고 하더라도, 해마다 발표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진다. 인물의 삶에서 어떠한 부분을 강조할 것인지, 조마다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해의 경우 킹의 인권 운동에 비중을 두는 반면, 또 다른 해의 경우 유전자 검사를 둘러싼 논쟁 또는 새로운 연구 영역의 개척에 주목한다. 교수자는 각 조가 초점을 맞춘 내용을 심화하고 미진하게 다루어진 부분을 보충함으로써, 학습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마지막은 개념과 이론의 소개이다. 킹의 BRCA1 유전자 연구가 촉발한 논쟁은 넓게 보면 의료화(medicalization)와 생의료화(biomedicalization)를 둘러싼 논의의 일부이다. 조별 발표와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이 끝난 뒤, 의료사회학과 의료인류학, 과학기술학 등이 제시하는 의료화의 순기능과 역기능, 의료화에서 생의료화로의 전환 등을 강의함으로써, 킹의 사례를 현대 사회의 맥락에서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이에 더하여 심화 학습이 가능하도록 의료화와 생의료화를 이론적으로 분석한 읽을거리를 추가로 제시하고, 의문이 생길 경우 이메일 등을 통한 질의응답이 가능함을 고지하였다.


6. 수업 진행자로서 나누고 싶은 경험


의학사는 어떻게 의학전문직업성 함양에 활용될 수 있는가.

‘좋은 의사’를 양성해야 하는 의과대학의 교육 목표를 고려할 때, 이는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 글은 그 한 가지 방법으로 인물사를 활용한 교육을 제시한다. 다만 이것이 오래된 오슬러 방법으로의 회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슬러 방법은 의학사의 주체를 일부 기득권 의사로 한정하고, 의학사를 진보의 연속으로 바라보게 하는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맥락을 사상한 추상적인 덕목을 제시하여 학습한 바를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인물사가 의학 교육에 그리 활발하게 활용되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나 인물사는 의학전문직업성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생생하게 전달할 힘을 가진 방법이다. 대안은 오슬러 방법과 인물사 교육의 등식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인물사 교육 방법론을 고안하여 활용하는 것이다. 새로운 방법론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초시대적인 덕목보다는 인물을 둘러싼 구체적인 맥락과 그 속에서 내려지는 선택을 강조함으로써 학습자가 ‘나는 어떤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입체적이고 다양한 인물을 선택함으로써, 역사의 숨겨진 행위자와 역사의 명암을 모두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예과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된 치유자리더십의 인물탐구 과정은 이러한 인물사 교육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예이다. 인물사를 이용한 인물탐구 수업의 성과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인물을 바라보는 역사학의 방법론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치유자리더십 인물탐구 강의는 예과 2학년 과정의 의학사 수업과 연결되는 일종의 선수 과목으로 기능한다. 구체적인 시대상 속에서 인물의 삶을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경험이 행위의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는 역사학의 연구 방법론과 조응하기 때문이다. 학습자는 이렇게 학습하고 익힌 역사학의 연구 방법론을 이용하여 자신이 발을 디딘 현대 한국의 맥락을 돌아볼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의학전문직업성의 함양에 필수적인 사회에 대한 성찰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현대 사회와 의학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학습하는 것이다.

의학전문직업성을 함양해 나가는 정체성 형성 과정의 핵심에는 사회적 가치의 내면화가 놓여 있다. 이는 사회와 사회 속의 의학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 조별 발표에 이어지는 인문사회의학의 주요 개념에 관한 강의에서는 앞서 언급한 질병에 대한 생의학 모형과 생정신사회 모형에 더하여,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의료화와 생의료화, 젠더 편향과 젠더 혁신, 공중보건과 국제보건 등의 개념을 소개하며, 이는 현대 사회와 의료를 이해하는 기초적인 틀이 될 것이다.

셋째는 인물의 삶으로부터 의학전문직업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를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사상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여러 층위로 구현된다. 하나는 인물 선정의 과정이다. 학습자는 주어진 열일곱 명의 인물 가운데 조별 발표와 개별 보고서 작성을 위해 두 명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이때 두 명은 수동적인 무작위 배정이 아닌, 각 조와 개인의 능동적 판단에 따라 선정된다. 학생은 미리 제시된 각 인물의 간략한 소개를 참고하여 인물을 선택하며, 일부 학생은 이 과정에서 의과대학 진학 이전에 품었던 의사상을 점검하고 발전시키기도 했다. 이를테면 어떤 학생은 루돌프 피르호의 예를 통해 고등학생 시절에 품었던 질병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재확인하였으며, 다른 학생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삶을 바탕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의사라는 목표를 발전시켰다.

또 다른 층위는 조별 발표가 진행되고 개별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학습자는 본격적으로 자신과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의학전문직업성을 향한 정체성 형성에 돌입한다. 일부 학생의 경우, 주어진 인물의 삶에 비추어 자신의 단점과 사회의 문제를 살피고, 이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사상을 정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은 조규상(曺圭常, 1925-2013)의 삶을 통해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 침묵하는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고, 사회 정의를 향한 관심과 실천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같은 맥락에서 일부 학생은 사회 구조에서 비롯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이에 대한 극복과 구조 개선을 향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 다른 학생의 경우, 여성으로서 받은 차별을 극복해 나간 인물을 개별 보고서 주제로 선정하고, 현대에 지속하는 젠더 불평등의 문제를 지적하며 개선을 다짐했다.

물론 어떤 구체적인 의사상을 제시하기보다는 향후 몇 년의 학습 계획을 서술한 학생도 있었다. 한 학생은 인물탐구 수업을 통해 의료가 여러 차원에 걸친 복합적인 실천임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학업을 통해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고민해 볼 것이라 썼다. 이는 정체성 형성의 실패라기보다는 의학 전(pre-medical) 단계에서 진행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보인다. 많은 논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정체성 형성 과정은 단계적으로 구성된다. 특히 의과대학에서는 예과에 해당하는 의학 전 과정과 임상 실습을 나가기 전과 후가 다를 수 있다. 아직 의과대학에 입학한 지 한 학기가 지나지 않은 학생이 수업을 통해 자아 탐색의 필요성을 느끼고, 의학의 사회성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였다면, 그것만으로도 의학전문직업성의 형성 과정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개선할 지점도 없지 않다. 하나는 강의 규모이다. 백여 명에 달하는 예과 1학년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이기 때문에, 조별 발표와 조별 보고서에 대한 피드백은 가능하지만, 개별 보고서에 대한 피드백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교수자를 추가하거나, 분반 수업의 형식으로 같은 수업을 여러 명이 동시에 개설하는 대안을 고려할 수 있으나, 피드백과 수업의 내용이 균일하지 못하다는 한계가 예상된다. 다른 대안으로는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의 학습 공동체 제도인 ‘셀’(cell)을 활용하여, 담당 지도교수가 개별 보고서를 바탕으로 학생 지도를 수행하는 방식 등을 고려할 수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담당 지도교수에게 의학전문직업성의 교육 과정을 충분히 설명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장기적 계획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정체성 형성 과정은 의학 전과 임상 실습 전, 임상 실습, 더 나아가 수련 과정과 그 이후로 이어지는 연속적 과정이다. 따라서 예과 1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치유자리더십 인물탐구 강의에 이어 추가로 정체성 형성에 초점을 맞춘 교육 과정이 설계되고, 이들 과정의 유기적 연계 속에서 정체성 형성 과정을 지속하여 추적할 필요가 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서는 인문사회의학 교육 과정인 옴니버스 교육 과정이 시행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의학전문직업성의 형성을 유도하고 있다. 다만 치유자리더십 이후 정체성 형성 과정을 추적하는 종적 연구가 부재하므로, 추후 이를 보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은 지속적인 교육 방법론 개발의 필요성이다. 확인한 바와 같이 인물사 교육 방법론은 의학사를 통해 의학전문직업성을 함양할 수 있는 좋은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학사를 활용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역사교육학의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인물학습에 더하여 사건학습, 개념학습, 주제학습 등의 교수법을 역사 교육에 활용할 수 있다. 의학사 교육도 마찬가지로, 의학전문직업성을 함양할 수 있는 여러 사건과 주제를 중심으로 강의를 구성하는 방법 등이 가능할 것이다. 비단 치유자리더십 인물탐구 과정이 아니더라도, 역사를 활용하는 다양한 과정에 이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의사학』에 게재된 박승만과 박지영의 논문, 「의과대학에서 의학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시기, 구성, 교육법」을 시작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박승만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의사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에서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연구자로서는 1960–8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의학 지식과 기술이 현실 속에서 생성되고 정당화되며 작동하는 과정을 살피고 있으며, 교육자로서는 예비 의료인을 대상으로 의료가 단순히 과학기술의 일부가 아니라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적 실천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어느 시골 농부의 ‘반의사’(半醫師) 되기: 『대곡일기』로 본 1960–80년대 농촌 의료」, 「천연한 자연과 완전한 자연: 1970년대 중반 한국 가톨릭 가족계획 사업과 자연피임법의 경합」, 「선진 기술을 향한 열망과 적정성의 역전: 1960–80년대 한국의 복강경-미니랩 기술 경쟁」, 「인물사: 의학사 교육을 통한 의학전문직업성 함양의 한 가지 방법」(공저), 「의과대학에서 의학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시기, 구성, 교수법」(공저) 등의 논문을 썼고, 윌리엄 바이넘의 『서양의학사』, 레이샹린의 『비려비마: 중국의 근대성과 의학』(공역) 등을 옮겼다. seungmann.her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