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The Korean Society of
Medical Education

Issue Vol.2 2023-09-06 2596

박지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장)

영화 <아뉴스 데이>를 통해 본 팬데믹과 의사


 

    아뉴스 데이(agnus dei)는 라틴어로 ‘신의 어린 양(羊)’이란 뜻이다. 어린 양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신에게 바쳐진 대표적인 희생제물(贖罪羊)로,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영화의 원제 는 ‘죄 없는 사람들’을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반 년이 지난 1945년 12월 폴란드의 어느 수녀원. 아름답고도 간절한 성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린다. 곧 한 수녀가 작정이라도 한 듯 망가진 문을 열고 마을로 내려간다. 거리에서 만난 고아들에게 ‘폴란드의사도 아니고 러시아 의사도 아닌’ 의사를 찾는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수녀를 프랑스 야전병원으로 안내한다. 병원에 들어간 수녀, 도움의 손길을 찾으려 하지만 다들 너무 바빠 아무도 수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다 여의사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다가가 도움을 부탁한다. 하지만 의사는 ‘폴란드인은 폴란드 적십자병원으로 가라’며 매정하게 수녀를 내쫓는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수술을 끝낸 후 한숨을 돌리던 여의사는 눈 속에서 미동도 않고 간절히 기도하는 수녀를 본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기도가 통했을까? 프랑스 여의사 마틸드는 수녀원으로 간다. 수녀원에는 난산(難産)으로 탈진 상태인 산모가 있다. 마틸드는 급히 산모의 배를 갈라 두 목숨을 구한다. 그런데 수녀원장은 그녀에게 고마워하긴커녕 외부인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뭔가 자꾸 감추려 한다.


    알고 보니 이 수녀원에는 임신한 수녀가 7명이나 있다. 대부분은 만삭의 몸이고(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것이다) 이틀 전에는 한 수녀가 아이를 낳다가 목숨까지 잃었다. 사태가 이 지경인 데도 수녀원장은 이 일을 철저히 은폐하려 한다.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마틸드, 하지만 도움을 거절하며 신의 뜻에 따르겠다는 수녀원장, 이제 이 이야기는 어떻게 풀려나갈까?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서쪽은 독일이, 동쪽은 소련이 침공해 들어와 폴란드는 동서로 쪼개져 점령당했다. 하지만 전쟁 말미에는 소련이 나치를 몰아내고 서 폴란드까지 장악했다.


    그러는 사이 수녀원은 독일군과 소련군이 번갈아 약탈했다. 수녀들은 점령군에게 성폭력을 당했고, 일부는 임신까지 했다. 194년 봄, 전선에서 총성은 멎었지만 겨울이 오면서 수녀원에서는 새로운 전쟁, 즉 출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도움을 구할 수는 없었다. 폴란드인들에게 알리면 더러운 소련군의 씨를 잉태했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고, 점령군에게 알리면 자신들의 폭력을 은폐하려 무슨 일을 벌일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3자인 프랑스 여의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마틸드가 수녀원에 머물던 어느 날, 소련군들이 수녀원에 들이닥친다. 수녀들은 두려움에 떨며 아무런 저항도 못하지만 마틸드가 용감하게 나선다. 그리고 수녀원에 ‘발진 티푸스가 돌고 있다’고 말한다. 소련군은 걸음아 날 살려라며 달아난다.


    발진티푸스 혹은 티푸스(epidemic typhus, typhus fever)는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그래서 장티푸스(typhoid fever)와 헷갈리기도 하는데 전혀 다른 병이다. 지금으로 치면 코로나19는 물론이고 에볼라만큼 무서운 병이었다.


    오랜 세월 인류를 괴롭힌 발진 티푸스는 이(爾)가 옮기는 세균인 리케챠(rickettsia)가 일으키는 감염병이다. 2주의 잠복기가 지나면 두통, 몸살, 오한과 고열이 나타나고 곧이어 온 몸에 작은 종기처럼 보이는 발진(發疹)이 돋고 환자가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면 발진+티푸스(tuphos 제정신이 아니라는 그리스어)에 걸린 것이다.


    병이 진행하면 온몸이 썩어 들어가고, 끔찍한 고통이 찾아오고, 혼수상태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치사율은 20%에 이르고 치료할 수도 없었다. 전염력은 엄청나게 높았다. 환자 한 사람이 발견된다면 이미 주변에 병이 다 퍼진 상태였다. 모두 불태우고 달아나도 이미 때는 늦었다.


    발진티푸스는 오래된 병이다. 15세기부터 유럽에 등장해 전쟁이나 기근으로 난민이나 포로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 방치되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갈아 입을 깨끗한 옷이 없으며 이가 힘을 얻고 티푸스도 번성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에서 3,000만 명이 감염되어 300만 명이 죽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포로수용소, 난민수용소, 감옥 등에서 수 백 만 명이 티푸스로 목숨을 잃었다. 특히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1941~1942)에서만 45만 명이 굶주림과 티푸스로 죽은 참사가 있었다. 그래서 제아무리 흉악무도한 소련군이라도 티푸스란 소리를 들으면 기겁을 하는 것이다.


    티푸스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놀라운 기지를 발휘한 의사 마틸드 볼리외(마들렌느 뽈리악(Madeleine Jeanne Marie Pauliac; 1912~1946),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전후에는 바르샤바의 프랑스 적십자 야전병원에서 일했다. 이 영화는 그녀가 겪은 사실을 토대로 만들었다. 영화의 배경은 1945년 12월이었고, 마틸드는 이듬 해 2월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슬프고도 놀라운 이 이야기는 70년 후에 발견된 그녀의 일기장을 통해 알려졌다.


    마틸드가 전후의 바르샤바에서 활약했다면 전쟁 중에 폴란드 남동부 로즈바도프 (Rozwadow)에서 활약한 의사들도 있다. 지역 개원의인 유게니우스 라조프스키(Eugeniusz Lazowski) 와 스태니슬라브 마툴레비치(Stanislav Matulewicz)는 수용소로 끌려가 비참하게 죽을 처지인 친구를 구하기 위해 티푸스를 이용한다.


    티푸스의 진단법은 바일-펠릭스 검사(Weil–Felix test)이다. 이 검사는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환자의 혈청을 프로테우스균(proteus)과 반응시켜 나오는 응집(agglutination)반응으로 확인한다. 발진티푸스를 일으키는 리케차의 일부 종류와 일부 프로테우스균의 항원이 같은 성질을 이용한다. 그래서 프로테우스균에 감염되면 티푸스 ‘위양성’ 반응이 나온다. 임상적으로 프로테우스 감염은 의미가 없기에 의사들은 신경도 안 쓴다.


    이 발칙한 의사들은 프로테우스균을 친구에게 주사한 후 피를 뽑아 독일로 보냈다. 당연히 ‘티푸스 양성 반응’이 나왔다. 덕분에 친구는 졸지에 환자가 되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았다. 성공을 예감한 두 의사는 주변의 유대인들에게도 주사를 놓아 ‘확진자’를 점점 늘려 나갔다. 나중에는 확진자가 유대인들에게만 보인다면 집단학살을 당할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해 폴란드인들도 확진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티푸스가 기승을 부렸지만 독일 당국은 감염이 두려워 제대로 된 현장 조사도 하지 않고 이 지역을 봉쇄했다. 단 한 사람도 이 지역에 들어가고 나가지 못하게 한 덕분에 수용소에 끌려갈 8,000명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건졌다. 이 정도면 ‘제2의 쉰들러’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티푸스의 역사에서 의사들의 활약이 언제나 해피엔딩인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 연구자들은 학문의 제단에 바쳐진 희생양이 되었다.


    1909년에 튀니지 파스퇴르연구소의 샤를 니콜(Charles Nicolle)은 이(爾)를 통해 티푸스가 옮는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다. 1916년에는 독일에서 일하던 브라질 병리학자 리마(Henrique da Rocha Lima)가 처음으로 병원체를 분리했다. 리마는 신종 병원체의 이름에 자신 대신 체코의 병리학자인 스태니슬라우스 폰 프로바제크(Stanislaus von Prowazek, 아래 프로바제크)의 이름을 넣어 리케차 프로바제키(Rickettsia prowazekii)로 명명했다. 두 사람은 함부르크의 교도소에서 티푸스를 연구하던 중에 둘 다 티푸스에 걸렸고 프로바제크는 1915년에 목숨을 잃었다. 리마는 그의 희생을 기린 것이다.


    리케차라는 이름 역시 이를 연구하다 죽은 미국 병리학자의 이름에서 따왔다. 리케츠(Howard Taylor Ricketts)는 미국 몬태나 주에서 진드기가 로키산홍반열(RMSF)을 옮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진드기 속의 리케차가 감염원이다. 리케츠 역시 1910년에 멕시코시티에서 티푸스로 죽었다. 로키산홍반열의 병원체는 그를 기려 리케차 리케치(Rickettsia rickettsii)로 불린다.


    이처럼 끔찍한 티푸스였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돌파구가 나온다. 살충제 DDT 덕분이다. 강력한 살충제는 리케챠를 옮기는 이를 죽여서 티푸스를 예방했다. 625전쟁 중에는 DDT를 쓸 수 있었기에 우리나라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록 필름에서 포로나 난민에게 뿌리는 하얀 분말이 바로 DDT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중에는 리케차를 직접 공격하는 클로람페니콜이나 테트라싸이클린 같은 항생제도 나와 지금은 티푸스는 치료할 수 있는 병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는 이제 거의 사라진 병이다.


    오늘날 우리가 강의실, 실험실, 병원에서 너무나도 편하게 이용하는 이런저런 검사나 치료법에도 이렇게 많은 사연들이 있다. 숨막히는 강의나 시험으로 점철되는 의대생의 시간들이지만 이런 영화가, 이야기가 잠깐의 휴식과 위안이 되면 좋겠다.


박지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장

1966년 부산에서 태어나 지금은 제주에서 신경과 개원의로 일하고 있다. 의학과 관련된 인문, 예술, 문화 탐구를 나름대로 하면서 『진료실에 숨은 의학의 역사』, 『이름들의 인문학』, 『역사 책에는 없는 20가지 의학 이야기』, 『신화 속 의학 이야기』, 『메디컬 오디세이』, 등 5권의 책을 썼다. 본인은 ‘medicultist’ 라는 영역의 창시자이자 ‘진료실의 고고학자’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