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Vol.2 2023-09-06 2641
이재호 (계명의대 해부학교실 부교수)
3월 24일이 무슨 날일까? 바로 세계 결핵의 날(World Tuberculosis Day)이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라는 감염병이 전 세계를 덮치며 우리 생활은 180도 변화했였고, 아직까지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온 의학을 통해 인류는 코로나바이러스로부터 힘겨운 사투를 이겨나가며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과거 인류에게는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감염병이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결핵이다.
유명한 명화 속에서 결핵으로 인한 가슴 아픈 사연을 찾을 수 있다. 먼저 르네상스 시대를 화려하게 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작품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피렌체에서 역사나 신화 작품과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그의 작품 중 우리에게 친숙한 ‘비너스의 탄생’은 르네상스 초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리스신화 속에서 비너스의 탄생과정에 대해 알아보자. 하늘의 신 우라노스는 자신의 자식들을 지하에 가두었는데, 막내인 크로노스가 우라노스의 음경을 낫으로 잘라 거세를 하였다. 우라노스의 생식기는 바다에 떨어져 거품이 되어 떠도는데,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거품을 섬으로 밀어내었다. 그러자 거품 속에서 아름다운 여신이 나타나는데, 바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다. 계절을 주관하는 여신들이 아프로디테를 단장해주고 거품(aphros)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아프로디테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는 그리스어 이름으로 중세 이후에는 라틴어로 비너스(Venus)라고 불리게 된다.
비너스에 대한 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보티첼리의 작품을 떠올리는데. 이 작품이 르네상스 시대 최초의 누드화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여신을 그리더라도 누드로 그릴 수는 없었는데 보티첼리는 여신의 모습을 빌려 여인의 아름다운 육체를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당시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다. 이 작품 속 비너스의 왼쪽에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Zephyrus)와 요정 클로리스(Chloris)가, 오른쪽에는 계절의 여신 호라이(Horai)가 꽃무늬가 가득한 옷을 건네며 환영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전체적인 배경은 다른 작가의 비너스의 탄생과 비슷하지만 보티첼리의 작품 속의 비너스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여신이지만 부끄러운 듯 머리카락과 손으로 몸을 가리며 정숙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리고 어딘가 아픈 듯 왼쪽 어깨가 축 쳐져 있고, 미모에 대한 자신감을 보이기는커녕 어디가 아픈 듯 멍한 표정을 하고 있다.
보티첼리가 비너스를 이렇게 표현한 것에는 그의 슬픈 러브스토리가 숨어있다. 작품 속 비너스의 모델은 바로 피렌체 최고의 미인인 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Vespucci, 1453~1476, 아래 시모네타)로, 보티첼리는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24살에 결핵으로 죽었는데, 보티첼리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수많은 작품 속에 그녀를 그려 넣었다. 이 작품 속 아프로디테의 마르고 긴 체형, 창백한 얼굴, 비정상적으로 가파른 어깨선은 시모네타가 심한 결핵환자임을 의심하게 한다.
그렇다면 시모네타는 정말로 결핵이였을까? 결핵(tuberculosis)은 결핵균에 의해 생기는 감염성 질환으로 약 85%는 폐에서 발병하기 때문에 흔히 폐결핵을 말한다. 주로 기침, 발열, 식욕부진, 체중 감소와 같은 전신 증상이 나타난다.
작품 속 비너스의 왼쪽의 어깨가 오른쪽에 비해 심하게 쳐져 있는데, 실제로 결핵으로 인해 폐가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기관에서 양쪽 폐를 이어주는 이동 통로인 기관지(bronchus)는 기관(trachea)의 말단에서 오른쪽은 3개, 왼쪽은 2개로 나누어진다. 오른쪽기관지는 짧고(2.5㎝) 굵으며 벌어지는 각도가 정중선에서 20∼40°인데 비해 왼쪽기관지는 길고(5㎝) 가늘며 벌어지는 각도도 40∼60°나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이물질을 잘못 삼켜서 기도로 넘어가면 왼쪽기관지보다 오른쪽기관지에 더 잘 걸리게 된다. 반대로 왼쪽기관지는 기침을 할 때 객담이나 가래가 기관으로 올라가서 배출되기 어렵다. 따라서 기관지결핵은 가래를 덜 뱉는 20대 여성에서 더 많이 생기며 특히 가래를 배출하기 힘든 왼쪽기관지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였을 때, 작품 속 아프로디테는 폐결핵보다는 왼쪽의 기관지결핵이 더 의심되기도 한다.
또한, 결핵 등의 호흡기질환에 의해 기침을 심하게 할 경우, 갈비뼈가 금이 가거나 골절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 주로 6번째 갈비뼈의 측면에서 골절이 가장 흔하며, 갈비뼈와 복장뼈 사이에 있는 갈비뼈연골에 염증으로 통증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보티첼리의 작품 속 비너스 또한 골절이나 염증에 의한 통증으로 왼쪽 가슴 부위를 웅크린 것은 아닐까 하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민족의 비통한 심정을 담은 이상화(1901~1943)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가 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추운 겨울도 시간이 지나면 곧 따뜻한 봄이 온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다. 보티첼리 역시 시모네타를 향한 마음을 자신의 그림 속에 표현하며 슬픔을 이겨내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최고의 작품은 단연 <프리마베라>이다. <프리마베라>는 이탈리아어로 봄 또는 청춘이라는 의미이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의 역사를 저술한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1550년경 메디치 가의 별장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꽃의 요정 클로리스를 잡고 있다. 클로리스는 제피로스에 의해 꽃의 여신 플로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강제적인 만남에 제피로스는 플로라를 꽃의 여신으로 만들어주며 500여 종의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 찬 정원을 선물로 준다. 그림의 중간에는 임신한 비너스와 눈을 가리고 화살을 쏘고 있는 큐피트가 보인다. 그리고 왼쪽에는 순결, 사랑,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삼미신이 춤을 추고 있고, 그 옆에 헤르메스가 있다. 비너스가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기에 메디치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보티첼리가 메디치가를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해석된다. 특히 그림 속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오렌지 나무 역시 이러한 해석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준다.
하지만 의학 혹은 해부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이 그림 속의 비너스 양쪽의 나뭇가지에서 허파(폐, lung)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상업의 신인 헤르메스와 서풍의 신 제피로스를 통해 그림을 의뢰한 메디치 가문이 상업적, 정치적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이라는 의지를 넣었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보티첼리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앞서 말한 대로 보티첼리는 사랑하는 시모네타를 그리워하며 <봄> 속의 플로라를 시모네타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아마 여위고 홍조를 띤 플로라의 얼굴을 그리면서 결핵과 같은 폐질환을 원망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명성에 걸맞은 예술가답게 그 아픈 마음을 작품으로 승화하지 않았을까 한다.
보티첼리는 이 외에도 많은 작품을 그렸는데, 그 중 시모네타를 모델로 그린 것으로 알려진 <비너스와 마르스>가 있다. 이 그림은 비너스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와 결혼한 후에 전쟁의 신 ‘마르스’와 사랑을 나누는 부적절한 사이를 표현하였다. 이 그림 속의 비너스의 긴 목과 쳐진 어깨는 이 그림의 모델 역시 <비너스의 탄생>속의 그녀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아프로디테의 불륜과 함께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를 표현한 그림으로, 육체적 관계 후에도 정서적 교감을 원하는 여성과 그렇지 못하는 남자를 보여주고 있다. 신혼부부에게 종종 이 그림을 선물로 주곤 하는데, 이는 서로에게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다.
보티첼리는 결핵으로 인해 시모네타를 잃은 슬픔을 뒤로하고 예술 작품을 통해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지켜가며 사랑에 대한 경고까지 하였다. 그 끝내 그는 시모네타의 발끝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과 함께 6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보티첼리에게 있어 시모네타는 가슴(폐)에 묻힌 사랑일 뿐 아니라 뮤즈였던 것이다.
의학과 해부학을 전공하고 현재 계명의대 해부학교실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의과대학 학생지원센터장과 의료인문학교실 전담교수를 겸직하며 의과대학 학생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자 하고 있다. 저서로는 『알고나면 쉬워지는 해부학이야기』, 『미술관에 간 해부학자』가 있고 감수한 책으로 『아트시트를 위한 해부학가이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