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Vol.2 2023-09-06 2832
여인석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교수 및 의학사연구소 소장)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제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감염병과 서(書)’에서 ‘서(書)’는 시서화(詩書畵)의 하나에 해당하는 ‘서(書)’인데, 이러한 맥락에서 ‘서’는 글씨 혹은 더욱 구체적으로는 서예라는 의미에 가깝다. 그런데 감염병과 글씨를 연결시키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글씨라는 의미에서 ‘서’를 문자 혹은 문자가 표현하는 개념으로 확장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감염병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과거에서 현재까지 동서양에서 사용되었던 다양한 용어들을 살펴보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통해 인류가 감염병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개념화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세계적 유행으로 인해 이전에는 전문용어로만 사용되던 상당수의 의학용어가 이제는 누구나가 아는 일상적 용어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용어가 팬데믹(pandemic)이다. 팬데믹은 전부, 전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pan’과 사람들을 의미하는 ‘demos’가 결합된 용어다. 유사한 용어로 유행병을 의미하는 ‘epidemic’이 있다. 이는 영어의 ‘to’나‘upon’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전치사‘epi’에 역시 ‘demos’가 결합한 것이다. 여기서 ‘데모스’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사람들을 말한다. 영어로 표현하면 ‘person’이 아니라 ‘people’에 해당하는 말이다. ‘데모스’는 민주주의를 뜻하는 ‘democracy’에서도 만나는 말이다. 민주주의란 한두 명의 권력자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demos), 즉 시민의 권력(kratos)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즉 팬데믹이건 유행병이건 한두 명의 사람이 아니라 집단으로서 다수의 사람에게 동시에 발생하는 질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와 함께, 그리고 당연한 귀결로 팬데믹은 공통된 원인에 의해 생기는 질병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공통적 원인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에 관련되는데, 대표적으로 공기나 물, 음식 혹은 천체의 영향 등이다. 그런데 팬데믹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행병으로 사용된 용어는 ‘epidemic’이다. 특히 『히포크라테스 전집』에는 『유행병』이란 제목의 글이 7편 존재한다.『히포크라테스 전집』에 실린 글이 전부 60여 편 정도 되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많은 분량이 유행병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행병』은 그 구성이나 내용에서 다른 글들과는 상당히 차별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먼저 『유행병』은 환자의 증례집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각 환자의 증례는 환자의 실명과 거주지역을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이어서 환자의 증상이 기술된다. 환자들은 대부분 발열을 호소하여 감염성 질환임을 짐작케 한다.
『유행병』에는 또 다른 특징도 있다. 어쩌면 증례들을 모았다는 사실보다 더욱『유행병』의 특징을 이루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개별 환자 증례를 기술하기 전에 ‘constitution’이란 부분이 먼저 온다는 점이다. ‘constitution’은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개념인데 어떤 지역 특유의 기후 조건을 계절에 따라 설명한 것이다. 이는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앓는 질병이 그 지역의 기후적 특징의 영향을 받으며 그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결국 유행병(epidemic)은 다수의 사람에게 동일하게 미치는 자연적 조건이나 환경에 의해 발생한 병이고, 그에 대한 서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여기에 서술된 각 환자는 발열을 주증상으로 하는 일종의 감염성 질환에 걸린 것으로 보이지만 전염의 개념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많은 사람이 같은 질병에 걸리는 이유는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시적 차원의 요인, 즉 기후나 천체의 변화와 같은 것에 공통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됨으로써 다수의 사람이 동일한 질병에 걸린다는 관념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질병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된다는 개념은 시대적으로 나중에 등장하며 이를 전염설 혹은 접촉설(contagionism)이라 한다.
어떠한 매개체를 통해 직접 질병이 전파된다는 생각은 이미 2세기의 의학자 갈레노스가 질병의 ‘씨(sperma)’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갈레노스는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를 휩쓸었던 대역병에 대해 기술하며 그 원인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접촉을 통해 감염되는 질병에 대한 이론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제시한 사람은 16세기의 의학자 프라카스토로(Girolamo Fracastoro, 1476-1553)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전염과 전염병, 그리고 치료에 관하여 De contagione et contagionis morbis et curatione』(1546)에서 살아있는 생명체가 사람으로 질병을 옮길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의 의학 이론은 전체적으로 전통적인 ‘감응설(sympathy)’에 근거해 있었다는 점에서 시대적 한계는 있었으나 그의 이러한 생각은 충분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사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질병을 옮기는 매개체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염설을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는 다수 환자의 동시적 발병을 동일하게 노출된 환경적 요인에서 찾는 것이 더욱 합리적 추론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발병의 범위가 넓을수록 더욱 거시적인 공통요인을 찾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14세기에 유행한 페스트이다. 이때 유행한 페스트는 2년 남짓한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전역을 초토화하였고, 희생된 사람만 당시 총인구의 절반에서 삼 분의 일에 이른다고 본다. 이처럼 광범위한 발병을 설명하기 위해 천체의 이변이 동원되었다. 당시 파리의과대학의 교수들은 페스트 발병 몇 해 전에 각자 자기 궤도를 돌던 행성들이 만나 일렬로 정렬하게 되는 행성들의 합(合)이 일어났고, 이 이례적인 천체 현상이 지상에 영향을 미쳐 유럽 전역에 페스트가 발병했다고 설명했다.
이후에도 감염병의 원인을 환경적 요인으로 보는 관점은 19세기 말 세균설이 등장할 때까지 의학계의 지배적인 관점이었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공기이다. 공기는 모든 사람이 마시는 것이므로 사람들이 동시에 ‘나쁜 공기’를 들여 마시면 동일한 질병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나쁜 공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공기에 포함된 해로운 성분을 서양에서는 ‘미아즈마(miasma)'라 불렀다.
미아즈마의 기원은 다양하다. 땅에서 올라올 수도 있고, 늪과 같이 고인 물이 부패하면서 생겨날 수도 있고, 또한 시체가 부패하면서 생겨나기도 한다. 실제로 미아즈마는 역병의 집단적 발병 양상을 잘 설명할 수 있는 효과적인 개념이었다. 그리고 미아즈마 이론에 기초한 19세기 유럽의 위생개혁운동도 충분히 긍정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거리에 방치된 오물이나 부패물에서 미아즈마가 발생하므로 이를 제거하여 청결한 환경을 확보하면 질병 예방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실적 효용성으로 인해 19세기 세균설이 등장한 이후에도 미아즈마 이론은 상당 기간 세균설과 경쟁을 하며 생명을 유지했다. 보통은 세균설의 승리를 돋보이게 하려고 환경을 중시하는 미아스마설과의 대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오염된 환경이 감염의 온상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므로 이들을 너무 대립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동아시아에서는 과거 감염병을 어떻게 보았을까? 먼저 서양의 유행병에 해당하는 용어는 ‘역병(疫病)’이다. 여기서 ‘역(疫)’이란 글자는 병들어 눕는다, 혹은 기댄다는 의미의 ‘疒(녁)’자와 ‘役’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글자이다. ‘疒(녁)’은 질병과 관련된 모든 글자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부수로 사용되므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역(役)’이란 글자가 고대 동아시아에서 유행병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역(役)’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아시아 전근대 시기에 국가가 백성들에게 강제로 부과하는 의무를 말한다. 다만 이 의무는 세금과 같이 현물이나 돈을 납부하는 의무가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다. 대표적으로 군역(軍役)과 요역(徭役)이 있는데 군역은 군인으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국민의 의무이다. 다음으로 요역은 현대국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백성들이 강제적으로 국가의 토목사업에 동원되어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役)의 개념이 유행병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가장 오래된 한자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온 백성이 다 병에 걸리는 것을 ‘역’이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역’이 모든 백성에게 부과되는 피할 수 없는 의무인 것처럼 모든 사람이 걸리는 질병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질병을 앓는 대상의 범위를 의미하는 말로 ‘역’이란 글자가 취해진 것이다. 다수에게 생기는 질병이란 의미라는 점을 생각하면 위에서 설명한 ‘epidemic’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또 다른 책인 『석명(釋名)』의 해석에 따르면 귀신이 행역(行役), 즉 여기저기 다니면서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 ‘역’이란 글자를 썼다고 설명한다. 이 경우는 대상의 범위보다는 질병의 발병 양상에 초점을 맞춰 ‘역’이라는 글자를 해석했다. 질병이 이곳저곳 장소를 이동하며 발생한다는 유행병(流行病)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한자학의 대석학인 일본의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선생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는 군역을 수행하기 위해 멀리 변경으로 갔는데, 이처럼 질병이 멀리까지 간다는 의미에서 ‘역’이란 글자를 취했다고 해석했다. 시라카와 선생의 해석은 ‘역(役)’이라는 글자가 원래 ‘人’ + ‘殳’로 사람이 창을 들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형상으로 ‘역’이 군역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멀리 간다는 의미 이외에도 군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것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발병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감염병과 관련해 사용하는 여러 용어 안에는 과거로부터 인류가 감염병을 겪으며 그 질병의 특징에 대해 생각했던 내용이 잘 담겨있다. 이것은 사실 감염병과 관련된 용어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의학의 모든 용어는 특정한 질병이나 의학적 관념에 대한 선인들의 생각들이 축적되어 형성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기계적으로 별다른 생각 없이 사용하는 용어들의 기원을 따져보는 것은 의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1990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기생충학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정부장학생으로 파리7대학에서 유학하여 서양 고대의학의 집대성자인 갈레노스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인식론·과학사)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교수 및 의학사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 권으로 읽는 동의보감』(공저) 『의학사상사』 『한국의학사』(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라캉과 정신분석 혁명』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생명과학의 역사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 『히포크라테스 선집』(공역) 『의학: 놀라운 치유의 역사』 『알렌의 의료보고서』 『생명에 대한 인식』(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