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The Korean Society of
Medical Education

Issue Vol.7 2024-08-26 1033

한성구 (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저 늙은이는 누구일까?

- 그렇게 많던 일본의 한의사(전통의사)는 다 어디로 갔을까?

 

Ishikawa Tairo

Ishikawa Tairo(石川大浪). Sugita Genpaku(杉田玄白)의 초상. 19세기 초

편견을 없애기 위해 누구인지 알기 전에 아무 설명없이 이 초상화를 살펴보자. 약간 수척한 몸에 주름진 얼굴을 한 노인이 앉아 있다.

배경에는 매화 가지가 있고 앞에는 책이 놓여져 있으며, 검소한 옷을 입고 있어서 공부하는 사람임을 알려주고 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 목에도 주름이 졌고, 쌍까풀이 없는 눈은 안검하수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눈빛은 살아 있고 온화한 느낌과 함께 총명함이 드러난다. 반짝이는 눈은 마음이 젊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꾹 다문 입매를 보면 내면의 의지가 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활동한 일본의 전통의학을 공부한 의사였다. 온화한 모습이 의사와 잘 어울린다. 원래 사무라이 계급이지만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의 사무라이는 여러 가지 일을 해왔다.

그는 전통적인 한의학을 공부하여 에도시대 오바마 번(小浜藩)의 번의(藩醫)가 되었다.
그런데 나가사키에 들어 온 네델란드의 문물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젊은 전통 한의사는 그 후 열심히 서양의학을 공부해서 ‘의사’로 탈바꿈을 했다.

(주: 번(藩)은 제후가 통치하는 지역을 가리키며, 번의(藩醫)는 그 지역을 담당하는 의사를 가리킨다)

일본 여행을 하다 보면 일본전통의학(한의학)을 진료하는 우리나라의 한의원에 해당하는 병원이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나라 의료는 한의학이 독립되어 있어서 의료가 양방과 한방으로 2원화되어 있다. 이로 인해 많은 모순을 겪고 있다.

일본에서 전통의학을 다루는 의원을 볼 수 없어서 필자는 해외학회에서 만난 일본 의사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본 적이 있다. 그 때 들은 답은 좀 충격적이었다. 서양의학을 접한 일본의 전통의사들은 기를 쓰고 서양의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나이가 너무 들어서 직접 공부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식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일본 전통의사가 서양의학을 공부한 의사로 탈바꿈을 했다는 것이다.

다시 초상화로 돌아가 보자. 모델이 된 사람은 스기타 겐바쿠(杉田玄白)로 서양의학 공부를 진짜로 열심히 했다. 결국에는 서양의학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에서 출판된 해부학 책을 4년에 걸쳐서 번역을 했다.

전통의학에서는 개념도 없었던 동맥, 정맥, 신경, 연골 등의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가면서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한자어 문화권의 의학은 스기타 겐바쿠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1774년에 『解体新書(카이타이 신쇼)』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이 해부학 책은 발간되자마자 매진이 되었다. 전통의학을 공부한 의사가 서양의학 공부에 매진한, 자기 직업에 대한 엄격한 프로페셔널리즘과 엄청난 지적 호기심을 발휘한 저변이 놀랍다. 그리고 보니 저 초상화에 펼쳐진 책이 바로 『解体新書』이고 그림이 해부도인 것 같다.

『解体新書』가 발간되기 전인 1759년에 야마와키 토요(山脇東洋)이라는 또 다른 일본 전통의사가 시체의 복부를 해부한 적이 있다. 그는 이 경험을 藏志(장지)라는 이름으로 출간한 바 있다. 동양의 전통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오장육부와 실제 장기는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새롭게 공부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일본 전통의학을 다루는 의사들은 다 알고 있었다.

藏志(장지)가 출간되고 4년 뒤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다. 조선통신사 일행중에는 수행원으로 간 조선의 한의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양의학에 매료된 일본 의사가 조선의 한의사에게 말했다. ‘새로 나온 책을 읽어 봐라.... 배를 갈라서 보니 우리가 전통적으로 배웠던 오장육부와는 많이 다르다. 나는 새로운 지식을 공부하고 있다......’

조선의 한의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적혀있다.
‘배를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으니, 미혹되지 말라. 우리는 새로운 설에 흔들리지 말고 옛 성현의 가르침을 익히는 것으로 족하다’
조선의 한의사는 남두민이고, 일본의 의사는 기타야마 쇼우(北山彰)였다.

의사로서의 프로페셔널리즘과 지적인 호기심에서 참패한 것이다. 그 이후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청하지 않았다, 1811년의 마지막 통신사는 대마도에서 국서만 교환하고 돌아가야했다. 조선으로부터 전혀 배울 것이 없다고 느낀 것이다.

한국에서도 한의사로서 서양의학을 열심히 익힌 분들이 있었다. 지석영, 김익남 같은 분들은 원래 한의사였다. 특히 지석영은 대한제국 때 설립된 관립의학교의 교장으로 서양의학을 공부하는 의사들을 배출한 분이다.

그런데 그런 지적 호기심과 뚜렷한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무장된 인물이 조선에는 너무 적었던 것이다. 지석영 선생의 잘못은 아니지만 만약 그때 관립의학교에서 젊고 똑똑한 기존의 한의사들을 입학시켰더라면 한국의 의료이원화는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만약 지금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했는데 우리의 의학을 뛰어넘는 의학을 가지고 있다면 누가 이를 배워야 할까? 일본의 전통의사들이 서양의학을 기를 쓰고 배웠듯이 현재 지구의 의사들이 외계의학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프로페셔널리즘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구의 의사는 신토불이를 내세우면서 지구의학을 사수하고, 외계의학은 기존의 의사와는 다른 사람들이 배워서 지구의학과 외계의학으로 2원화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성구 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서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고 수련을 마친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에서 정년퇴임할때까지 호흡기내과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1990년부터 2년 동안 미국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의 연구원으로 재직하는 동안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국립미술관을 드나들면서 미술 감상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이 계기가 되어 『의사신문』에 ‘Medicine in art’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했으며, 『그림 속의 의학』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