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Vol.7 2024-08-26 496
이성낙 (전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장)
“의사는 어떤 직업인인가?”
이렇게 질문하기에 앞서, 우리나라에서 고등교육 과정을 거쳐 사회에 배출되는 다양한 직업인과 의사는 어떻게 다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사회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각자 제 역할을 통해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의사는 물론 수많은 직업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한 예로 법학대학원 과정을 거친 율사(律士)는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문화·예술 장르에 종사하는 사람들 또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사회인’이며, 앞으로 의학계에서 종사할, 또는 이미 종사하고 있는 의료인 역시 사회의 한 구성원이다.
의학교육을 받은 사회인은 일반적인 사회인과 비교할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의료인’은 여느 직업군과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사람의 생명을 지근(至近)한 거리에서 대하는 것이다. 때에 따라 산모와 신생아의 건강을 살펴야 하는가 하면,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의학적으로 특별한 조치를 취하기 어려운 분들도 의사가 만나서 그들의 고충을 해결해 주어야 하는 대상이다.
환자라면, 남녀노소(男女老少)는 물론 사회적 빈부(貧富)의 차별 없이 살펴야 하는 직업인이 바로 의료업에 종사하는 의사이다. 의과대학 교육은 이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사람을 직접 대상으로 하고, 모든 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하여 그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직업군과 완연히 다르다.
이는 필연적으로 성별과 나이를 뛰어넘어 모든 사회계층의 사람들을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의성(醫聖)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BC 377?)의 사상을 이어받은 이들이 이미 두 밀레니엄보다 더 전에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히포크라테스 선서(Hippocrates-Oath) ’에도 의사와 의학이 갖추어야 할 내용이 담겨져 있다.
특수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의학교육에 반영하여야 할까?
필자는 문화·예술을 가슴에 품은 의사를 배출하는 것을 염원한다. 이와 같은 의사를 배출할 수 있다면, 의과대학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 자라나는 학생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큰 몫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문화·예술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의료인은 그렇지 않은 사회인과 분명 구별될 수 있다고 믿는다.
1980년대에 국내 여러 의과대학에서 수업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수업에 앞서서 우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즉 고등학생 시절에 좋아하는 작품을 보기 위해 또는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한 연극공연을 감상하기 위해 공연장을 찾아간 적이 있는가? 또는 오페라나 교향곡이 좋아서 콘서트홀을 찾아가 감상한 적이 있는가?”
당시 수업에 참석한 학생 중 그렇다고 손을 들었던 학생의 숫자는 생각보다 적어서 20%를 넘지 않았다. 같은 질문을 다른 두 의과대학에서도 반복하여 던져 보았다. 그 응답률은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적어도 50%는 가볍게 넘으리라 예상하였는데 의외로 저조하였다. 놀라움을 넘어서 참담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대보다 유경험자가 적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교육전문가에 따르면 ‘공붓벌레 증후군’이라 했다. 즉,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오로지 공부’만 하느라 멋진 공연 한 번 구경하지 못하고 대학에 입학했다는 뜻이다.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문화와 예술적 소양을 지닌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시간이 없어서 문화를 즐길 수 없다면’ 문화를 강의실로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필자가 학장으로 재직하던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교육과정에 1994년부터 ‘의료인문학’ 수업을 마련했다. 이 시간에 왜 연극이 생활에 필요한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의과대학 수업시간에 저명한 극작가를 초빙하여 극작가와 의대생들이 대화의 장을 가지도록 했다.
또 국악전문가를 모시고, 국악은 어떤 예술적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다. 사람의 몸을 대상으로 하는 의사가 문화·예술적 감각을 키우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다.
필자는 이보다 앞서 의학교육평가원이 설립되던 시기에 ‘의료인문학’의 중요성을 설파하기도 했고, 지금은 의학교육평가 항목에 의료인문학 교육내용이 필수항목으로 채택되어 있다. 1994년에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료인문학 전임교수를 임용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많은 의과대학에서 인문학을 담당하는 전임교수가 임용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의과대학에서 문화·예술을 포함한 인문학 교육은 더 강화되어야 한다.
물론, 국내 의대생들이 CD, Video와 같은 디지털매체를 통하여 나름 문화·예술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교향곡을 감상하려 콘서트홀을 찾아가서 경험하는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콘서트홀이나 극장에서 문화·예술을 즐기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의료인이 더욱 의료인답게’ 만드는 요소는 분명 ‘문화·예술 비타민(Vitamin) ’에 있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의사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적 소양을 키워야 한다.
추천하는 책
기업가 워렌 버핏(Warren Edward Buffett, 1930~)이 인문학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기업가로 성장한 거부 워렌 버핏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같은 축에서 한 미국 사회비평가는, "부자는 자식에게 인문학을 가르치고, 가난한 자는 기술을
가르친다"라고 했다.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묵직한 메시지이다.
독일 마르부르크대학교 의과대학 예과를 졸업하고, 뮌헨대학교에서 의학사,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피부과 전문의와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학 교수,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초대 학장·의무부총장을 거쳐 가천대학교 명예총장, 국제베체트학회 회장을 지냈다. 2014년 명지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병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한국 의·약사평론가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를역임했다. 2015년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이 수여한 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