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The Korean Society of
Medical Education

Issue Vol.7 2024-08-26 1232

유임주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자가 『클림트를 해부하다』를 쓰게 된 이야기

클림트 - 키스

그림 1. 클림트. <키스(The Kiss, 1907-1908)>, 벨베데레 미술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작품 <키스(The Kiss)>를 보다가 영감이 떠올라 고지식한 해부학 교수가 의학사와 미술사의 언저리를 여행한 경험을 《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아래 JAMA)》에 논문을 싣게 되었다. 순탄치는 않았던 그 과정에 쌓인 이야기를 추려 『클림트를 해부하다』라는 책을 쓰게 된 이야기를 공유한다.

뜻밖의 여행에서 ‘키스’의 서사에 빠지다

2020년 COVID-19가 전 세계를 위협하던 시기에 우울하고, 위축된 1학기를 견디고 있었다. 부산관광공사에서 6월 말에 열리는 “부산 MICE로드쇼”에 초청한다는 이메일이 왔다.

의학에 종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MICE라 하면 자연스럽게 실험용 생쥐를 연상하지만, MICE 산업은 Meeting, Incentive tour, Convention, Exhibition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의 첫머리를 딴 것이다. 요즘 지자체들이 학술대회 등을 유치하여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는 굴뚝 없는 산업으로 많은 공을 들이는 분야이다.

필자가 2018년 한국 현미경학회 회장으로 일할 때, 제19회 세계 현미경학회(IMC19) 시드니 대회에서 미국, 스페인, 네덜란드, 남아공과의 치열한 유치 경쟁을 뚫고 2022년에 열리는 세계 현미경학회(IMC20)를 대한민국 부산에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부산관광공사 직원들의 물심양면의 지원이 있었고, 나 자신도 학술활동을 하면서 국가를 위해 뭔가 기여했다는 뿌듯한 느낌으로 동료 연구자들과 가슴 뭉클한 밤을 보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학술대회 준비를 위해 부산을 자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부산관광공사에서 이러한 인연으로 초청을 한 모양이다.

도착 첫 날 만난 부산의 바닷바람만으로도 잠시나마 COVID-19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었다.
둘째 날 아침 일정으로 해운대 벡스코 건너편에 있는 “뮤지엄 다(현재 뮤지엄 원)”를 방문하게 되었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명화에 동적 요소가 더해진 디지털 영상들이 걸려 있었다.

전시실 입구 쪽에 클림트의 <키스(The Kiss)>와 <다나에(Danae)>가 보였다. 무심코 그림을 보는데 <키스>의 그림에서 알 같은 형태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곁에 걸린 <다나에>에는 발생학 시간에 나오는 주머니배가 명확하게 그려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전시실 2층에는 카페가 있었는데 커피를 받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키스>와 <다나에> 동영상이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2006년 유럽 신경과학회 때 반강제(?)로 들은 칸델(Eric Richard Kandel, 1929~ ) 교수의 강연을 회상하며 역사 속으로의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칸델 교수의 강의와 『통찰의 시대』

칸델 교수는 2000년에 기억의 메커니즘을 전기생리학적으로 규명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분이다. 의대생 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신경과학에 대한 동경으로 꾸역꾸역 읽었던 명저 『Principles of Neural Science』의 저자이기도 하다.

당시에 저는 학습을 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시냅스의 변화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학회에 참석하니 칸델 교수님의 특강이 있다고 해서 당연히 노벨상을 받은 학습과 기억에 대한 내용이라 생각하고 강당에 들어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강연 제목은 “빈 의과대학과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의 기원”이었다. 미술에 식견이 없었던 내게는 다소 당황스러웠으나, 이미 꽉 찬 강당에서 빠져나가기엔 무리였다. 결과적으로 반강제적으로 강연들 듣게 된 것이다.

강의 내용은 세기말 빈 의과대학의 성취와 융합적 학풍이 모더니즘을 자극하였고, 클림트의 그림에는 생물학적 표상과 같은 특징이 나타나고, 실레(Egon Schiele, 1890~1918)와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등 유명한 화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학습과 기억에 대한 연구에 몰입되어 있던 필자는 약간의 실망감과 함께 듣는 둥 마는 둥 지나쳤던 기억이 있다. 이후 2012년 칸델 교수님은 『The Age of Insight』를 출간하였다. 우리나라에는 2014년 『통찰의 시대』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이 책은 1900년 빈의 상황과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의 그림을 중심으로 과학과 예술이 어떻게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를 살펴보며 신경과학적으로 인간이 사물을 어떻게 알아보고, 아름다움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어떻게 인식되는가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칸델 교수의 광팬이라 무작정 구입하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내용이 별 재미가 없어 3분의 1쯤 읽고 덮어 버렸다.

JAMA에 논문을 내다!

칸델 교수의 강연을 들은 지 10년이나 지난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운명적으로 클림트의 작품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키스>와 <다나에>에서 본 발생학적 도상이 나의 머리를 맴돌고 있었다.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책장에 꽂혀 있던 『통찰의 시대』를 꺼내 들고 정독하기 시작했다. <키스>에는 칸델 교수의 설명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칸델 교수는 정자와 난자의 존재를 말씀했지만 나는 <키스>에서 생명의 시작을 담당하는 생식세포인 정자, 난자, 수정 과정, 수정난이 분할되어 오디배에 이르는 과정과 고해상도로 그려진 정자의 목부분에 있는 미토콘드리아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저널에 에세이 형식으로 <키스>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점점 내용에 대한 독창성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고, 욕심이 생겨 《JAMA)》에 투고하게 되었다.

요즘은 전자 저널이 대세여서 인쇄된 잡지를 볼 기회가 많지 않지만, 필자가 의대생일 때만 해도 3대 의학 저널인 《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아래 NEJM)》, 《The Lancet》, 《JAMA》 등을 의국과 도서관에서 쉽게 볼 수 있어, 선배들이 던져놓은 저널을 집어 보기도 했었다. 특히 《JAMA》는 표지가 다양한 명화로 장식되어 있어 보기가 좋았고, 그림에 대한 에세이가 실렸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JAMA》는 의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다루는 이라는 섹션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 내 연구 결과를 투고하면 제격이겠다고 생각했고, 말이 되든 안 되든 모두 써서 투고했는데 다행히 거절당하지 않고, 다섯 번의 논문 수정을 거쳐 최종 논문 게재 승인을 받게 되었다.

‘키스’라는 작품을 살펴보자 (이 글의 많은 부분은 『클림트를 해부하다』 pp153~174에서 인용했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에 그려진 <키스>는 오스트리아 상징주의 화가 클림트의 대표작으로, 1908년 비엔나 미술전에 처음 발표된 작품이다. 처음에 클림트는 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관객들은 황금빛 배경에서 막 키스를 하는 연인의 황홀경에 홀려서 <키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시회가 끝나기도 전에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구매하였고, 지금은 비엔나의 벨베데레(Belvedere) 미술관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9년 CNN이 전 세계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인기 있는 그림에 대한 설문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 <모나리자>가 1등을 차지했고, <키스>는 6위를 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그림이다.

그림을 자세히 하나하나 살펴보자!
일단 금박과 은박이 많이 쓰여 물리적으로 관객들을 압도하는 면이 있다. 클림트의 아버지는 보헤미안 출신의 금세공사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클림트는 금박과 은박을 자신에 그림에 멋지게 활용한 화가였다.

우주의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황금빛을 배경으로 꽃이 만발한 초원 위에 두 연인은 무릎을 꿇고 막 입맞춤하려는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이미 여자는 황홀경에 빠져있고, 그 황홀한 느낌이 관객에도 이입된다.

남자의 망토를 보면 세로로 배치된 금색, 은색, 검정색의 직사각형이 있어 남성성과 강인함을 보여주고, 여자의 옷에는 여성의 생식력을 상징하는 원형과 타원형의 문양으로 채워져 있다. 미술사학자 코미니(Alessandra Comini, 1934~ )는 이러한 내용을 “원 형태와 수직형의 화려한 교합 속에서 아름답게 펼쳐지는 욕망의 상호 관계의 궁극적인 절정”이라고 평했다. 특히 칸델 교수는 좀더 구체적으로 남자의 옷에 그려진 세워진 직사각형은 정자를 상징하며, 여자의 옷에는 여성의 생식력을 상징하는 타원형과 꽃이 그려져 있다고 했다.

이렇게 칸델 교수가 분위기를 읽었다면, 나는 정자, 난자, 수정란, 그리고 분할이 시작되어 8세포기와 오디배 시기를 정확하게 포착했다. 해부학자로써 클림트가 연인의 옷 속에 숨겨둔 발생학적 코드를 찾게 된 것이다.

의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키스>를 이해하기 위해 발생학의 역사를 되새김하면 도움이 된다. 현미경의 발명으로 17세기에 정자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19세기 초에 난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사람의 발생 과정은 이미 축소 인간인 호문쿨루스가 정자 또는 난자에 내재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각각의 부분이 커지면서 인간이 된다는 “전성설(preformation)”과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각각 유래한 어떤 요소들(정액, 혈액)이 합해져서 이것이 분화 발달하면서 인간이 발생한다는 “후성설(epigensis)”이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 문제는 극피동물인 성게를 체외 수정하여 현미경으로 실시간 관찰한 헤켈(Ernst Haeckel, 1834~1919)의 제자인 헤르트위그(Oscar Hertwig, 1849~1922)가 정자로부터 유래한 풋핵과 난자 속의 풋핵이 융합하는 과정을 통해 수정이 완성됨을 밝힘으로써 생명 탄생에 정자와 난자가 각각 기여함을 밝혔다 (그림 2).

융합

그림 2. 성게 알 수정과정에서 정자로 유래한 풋핵(Male nucleus, 청색)과 난자로부터 유래한 풋핵(Female pronucleus, 적색)이 하나로 융합(Fused nucleus, 녹색)하는 장면을 스케치 한 장면 (After Oscar Hertwig, Embryology of Man and Mammal, 1905)

융합2

그림 3 정자가 난자에 접근하면 난막에서 돌기가 나와 결합하고(A), 정자가 운동을 하여 난막을 뚫은 후 핵이 전달된다(B). 이후 난막이 구조적 변화를 일으켜(C) 더 이상의 정자의 진입을 막는다. (After Oscar Hertwig, Embryology of Man and Mammals, 1905 중에서 Fol의 논문 그림 인용)

헤켈의 또 다른 제자인 폴(Herman Fol, 1845~1892)은 불가사리를 체외수정하고 실시간으로 추적 관찰한 결과, 하나의 정자가 수정되고 나면 난막이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켜 더 이상의 정자가 수정되지 않은 것을 발견하여 1개의 난자에는 1개의 정자만 수정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림 3).

융합3

그림 4. <키스>에서 발견되는 남성성과 정자

<키스> 그림에서 정자를 찾아보자 (그림 4). 남성성을 상징하는 부분은 남자의 옷에 표현되어 있다. 클림트는 세로로 긴 직사각형을 남성의 성기 모양의 상징으로 써왔다. 또한 클림트는 정자의 형태를 스타일리쉬한 도식으로 표현하였다.

여자의 옷을 살펴보면 도라지 꽃 같은 다각형이 많이 관찰된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이 다각형에 물결치는 듯한 꼬리가 붙어 있는데, 이것이 광학현미경으로 관찰되는 정자의 모습이다. 이미 19세기에는 광학현미경(LM) 기술이 충분히 발달되어, 이 정도의 영상을 얻을 수 있었다.

정자의 이미지가 다른 곳에서도 포착되는데, 이것은 매우 놀라운 발견이다. 다시 남자 옷 쪽을 살펴보자. 일부 속이 비워져 있는 검정 직사각형 주위에 흰색으로 둘러싸여 있는 검은 점들이 보인다. 얼핏 보면 다양한 배경처리용 무늬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전자현미경(EM)을 이용한 생물 조직을 분석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마치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했을 때 정자의 목 부분을 감싸고 있는 미토콘드리아’와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오른쪽에 최신의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정자의 모습을 스케치 형태로 그린 걸 살펴보면 머리 부분에는 핵이 보이고, 그 위쪽에는 수정에 사용될 효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첨단체가 보인다. 머리 아래에 붙어 목 부분에 좌우로 검은색의 반복되는 원형구조물이 보이는데, 이것이 미토콘드리아다. 이 미토콘드리아는 생물학적 에너지인 ATP를 생산하여 정자가 꼬리를 운동시켜 생식관을 통과해 최종적으로 난자에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상한 점은 전자현미경이 1931년에서 1933년에 걸쳐 독일의 과학자 루스카(Ernst Ruska, 1906~1988)에 의해 발명되었는데, <키스>는 1908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점이다. 알고 보니 당대에는 정밀한 관찰을 한 과학자가 이미 존재했었다. 메브스(Frederic Meves, 1868~1923)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이미 1899년에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듯한 정자를 그렸다(그림 5).
그림 5의 오른쪽 그림은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정자의 횡단면, 종단면 그리고 3차원 재구성 그림이다.

정자 그림

그림 5. 메브스가 그린 고해상도 광학현미경 그림과 전자현미경 사진으로 제작된 아트 포스터

<키스>에서 여자의 옷에는 난자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황금색을 배경으로 파란색으로 경계가 그려지고 속은 노란색으로 채워진 원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이 난자의 형태이다. 마치 계란을 깨었을 때 보게 되는 형태와 유사하다.

수정되지 않은 난자와 수정된 난자

그림 6. 수정되지 않은 난자(파랑)와 수정된 난자(주황)

자세히 다시 보면 대부분의 난자를 감싸고 있는 막이 청색으로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독 단 하나의 난자만 오렌지색으로 표현되었다 (그림 6). 바로 그림 3C에서 수정 후 구조가 바뀐 것을 클림트가 색상으로 코딩한 것이다.

즉, 아직 수정되지 않은 난자는 청색으로, 수정된 난자는 오렌지색로 표현하였다. 통상 오렌지색은 주의•경고를 뜻함으로 ‘난 이미 수정되었으니, 제게 오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세요’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 같다.

수정된 접합자는 어떻게 배아로 발달해 가는가?
수정의 결과로 염색체수가 회복되고 이제부터는 유사분열을 통해서 세포 수를 늘려나간다. 이때 늘어가는 세포를 분할알갱이(blastomere)라고 부른다. 분할알갱이의 수에 따라 2, 4, 8 할구체로 불리고, 12개 이상이 되면 뽕나무 열매처럼 보인다고 해서 오디배라고 한다. <키스>에 8할구체와 오디배가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키스>에는 인간 발생 3일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7

그림 7. 접합자가 분할되어 8할구체 (A의 적색 원)와 오디배((A의 보라색 원)로의 발달 되는 것을 보여줌, B는 그레이(Henry Gray)가 쓴 『Anatomy』에서 인용함 (미국에서 발행한 20ed, 1918)

<키스>는 시공을 넘나들게 하는 포트키(portkey)

포트키(portkey)라는 멋진 마법의 도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해리포터』를 읽으면서였다. 미리 마법을 걸어둔 어떤 물체에 접촉하게 되면 빠른 속도로 지정된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신박한 마법이다.

클림트가 <키스>에 걸어둔 마법의 포트키인 발생학적 아이콘을 발견하게 되면서 나는 이것을 통해 클림트가 활동하던 시공인 세기말의 빈으로 타임슬립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그림 속에서 발견한 발생학적 소견을 중심으로 쓰다 보니 정말 몇 줄이 되지 않은 전형적인 이과생의 입 짧은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역사적, 미술사적, 의학사적 고찰을 하나하나 넣어가려고 하니 새로운 공부가 필요했다. 바로 과학사, 미술사, 그리고 지성사다.

내가 발견한 것은 의학 공부를 하면서 교과서 등에 있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1)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공부하는 교과서 나오는 내용이 발견되었을까?
(2) 클림트라는 화가가 어떤 존재였기에 그 내용을 잡아서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내었을까?
(3) 이 과정에서 필연코 있을 수밖에 없었던 과학자와 예술가의 교류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공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을 『클림트를 해부하다』라는 책으로 펴냈다. 글을 써 가는 동안, 해부학에만 집중하여 균형 잡힌 교양이 부족한 의과학자가 넓은 세상을 보게 되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놀이를 배웠을 때처럼,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즐겼다.

이때 큰 골격이 되어준 것은 뜻밖에도 반강제로 들은 칸델 교수의 강연과 책 『통찰의 시대』였다. 이 책을 읽고 클림트와 관련된 책과 논문을 차근차근 읽어가고, ‘세기말의 빈’이라는 인류 지성사의 아주 특별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접하게 되었다.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의학을 생각하면 어느 나라를 생각하는가? 아마도 나라는 미국, 지리적으로는 미국 동북부에 있는 의대를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계의 최고 저널 중에 하나인 《NEJM》의 이름은 바로 “New England 지방 의학잡지”인 것이다. 이들이 세계 의학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 2차대전 이후이다. 세기말 빈은 세계 의학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미국의 의사들이 독일어권 국가에서 유학하였고, 그중 하나가 빈 의과대학이었다.

유학생 중 미국 의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의사로는 오슬러(William Osler, 1849~1919), 할스테드(William Halsted, 1852~1922), 하비 쿠싱(Harvey Cushing, 1869~1939) 등이 있다. 특히 오슬러와 할스테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 병원을 창설하였고, 오슬러가 1892년에 저술한 내과 교과서는 40여 년간 세계 각국에서 내과학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클림트가 생물학, 의학, 진화 발생학적 지식을 접하게 된 것은 그의 적극적인 탐구력에 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서를 했다고 한다. 클림트의 서재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이 있었고, 요즘으로 치면 “그림으로 보는 동물 백과” 같은 책이 있었는데, 클림트 작품을 채우는 아이디어의 원천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소양을 배경으로 당시 빈의 독특한 카페문화, 살롱 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빈의 살롱은 중산층 부인들이 자신의 거실을 개방하여 여러 분야의 지식인들 토론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제공하였는데, 저커칸들(Berta Zuckerkandl, 1864~1945)이 운영했던 살롱이 그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살롱 중 하나였다.

그녀의 남편은 빈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였다. 자연스럽게 클림트와 저커칸들(Emil Zuckerkandl, 1849~1910) 교수는 친해졌고, 실제로 해부학 실습실 견학을 하게 되면서 피부밑에 존재하는 인체 구조를 이해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클림트가 예술가를 위한 해부학 강연을 요청하여, 1903년 저커칸들 교수는 예술인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게 된다.

당시 해부학은 물론이고, 생물학, 발생학, 조직학, 진화론 등이 내용이 강의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모든 내용이 클림트의 작품의 중요 소재가 된다. 그 결과 1903년 강의 이후에 클림트의 작품에 현미경으로 관찰한 세포, 조직의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예술과 의학의 융합

애플의 창업자 잡스(Steve Jobs, 1955~2011)가 iPad2를 발표할 때 “애플의 창의적 DNA는 기술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인문학이 결합하여야 비로소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이보다 먼저 클림트는 20세기 초에 이미 예술과 의학을 결합한 융합을 인류에게 보여준 것이다.

<키스>는 두 연인의 에로티시즘을 보여줄 뿐 아니라, 1900년대 전후의 과학적 성과를 기반으로 피부밑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생명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의과학적 걸작인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접하게 된 빈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였던 저커칸들 교수가 남긴 말이 인상에 남는다.

“연구자, 과학자는 예술적 요소가 그에게 살아 있지 않는 한 결코 완전히 생산적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과학자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과학의 교조주의를 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 저커칸들 교수가 클림트 등의 예술가와 소통하고 해부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예술과 과학의 통섭에 대해 20세기의 유명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상상력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예술가다.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지식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상상력은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위대한 과학자는 위대한 예술가와 같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과학자와 같다.”

위대한 예술가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내 그림은 연구이자 실험이다. 나는 예술 작품으로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내가 하는 모든 건 연구다”라고 말했다. 두 거인의 말로부터 결국 예술과 과학의 본질은 깊이 맞닿아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세상을 이해하고 잘 표현하기 위해서, 과학은 예술적 상상력을, 예술은 과학적 실험정신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의사들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자유롭게 교류하고, 서로의 학문을 배우고 통섭한다면 새롭고 창의적인 의학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맺음말

필자는 전형적인 이과형 인간으로 의과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마치고, 기초의학교실에 남아 학생들에게 해부학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살아온 아주 건조한 사람이었다. 고백하면 클림트의 작품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았다. 클림트의 작품에 그려진 과도한 노출과 나신들이 불편하게 느껴진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키스>에서 보게 된 발생학적 도상을 통해 그의 작품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고, 클림트가 작품을 구성한 배경을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이제는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좋은 취미가 하나 생겼다. 그림을 그냥 보지 않고, 공부하면서 살펴보고 읽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경험을 꼭 집어 표현한 최재천 교수의 말씀을 소개한다. “알면 사랑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피상적으로 볼 때와, 공부하고 난 후 볼 때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주변에 관심 있는 것이 있다면, 공부하고 탐구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또 즐기시라. 이 과정은 여러분의 인생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줄 것이다.

추천 도서

(1) 유임주. 클림트를 해부하다. 한겨레출판, 2024.
위에서 기술한 내용은 주로 클림트의 <키스>를 중심으로 소개했으며, 클림트가 평생 추구했던 예술세계를 총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클림트의 작품에 숨어 있는 해부학적, 조직학적, 발생학적 아이콘들을 살펴보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Part I: 클림트의 탄생 : 클림트를 해부하기 전 필요한 배경지식 제시
Part II: 클림트 코드를 파헤치다: 본격적으로 클림트의 여러 작품을 해부
Part III: 인간 예술의 기원을 좇다: 생명의 발생과 진화를 탐구한 화가들을 소개

(2) 전원경. 클림트. arte, 2018.
유럽의 예술과 문화, 역사를 배경으로 클림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지식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클림트가 살았던 ‘세기말’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빈’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설명하고, 클림트의 다양한 작품을 편안하게 접할 수 있는 책이다.

(3) 에릭 캔델. 통찰의 시대, 이한음 역, 알에이치코리아, 2014.
저자가 『클림트를 해부하다』를 집필할 때 기본이 되었던 책이다. 1900년 전후의 빈을 지성사, 과학사,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소개한다. 흥미로운 것은 어떻게 빈 의대가 최고 수준으로 발전했는지?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소개하는 부분은 의학도로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하여 신경과학자로서 “우리는 어떻게 물체를 인식하고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인식하는지?”에 대한 최근까지의 연구를 소개한다. 노벨상을 수상한 대가의 진면모에 접할 수 있는 대단한 책이다.

(4) 칸 쇼르스케. 세기말 빈, 김병화 역, 글항아리, 2014.
지성의 용광로였던 세기말 빈을 다뤄 퓰리처상을 받은 책이다. 클림트가 살았던 빈을 역사적, 지성사적 관점에 조명한 책으로 클림트의 중요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소개와 토론이 포함되어 있다. 20세기 초 빈이라는 시공에 꽃피운 수많은 사조가 싹튼 온상이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유임주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이자 4단계 BK21 융합중개의과학 교육연구단장, 대한의사협회 학술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구조가 기능을 결정한다(Form forms function)”는 형태학의 원칙에 따라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고 있다. 뇌기능 매핑 연구, 생체조직 분석을 위한 현미경 연구, 한국인의 해부학적 특징 규명과 임상해부 연구, 일상에서 얻게 된 의문을 해부학의 관점에서 풀어가는 것에 관심이 있다. 학생들에게 해부학, 조직학, 신경해부학, 발생학을 강의하면서 얻게 된 궁금증을 연구의 주제로 삼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해부학자의 눈으로 분석하여 세계 3대 의학저널인 《JAMA》에 게재하기도 했다. 1996년 모교에 부임한 이래, 해부학 교육과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대한체질인류학회 부회장, 한국현미경학회 회장, 대한해부학회 이사장,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사무총장, 대한의학회 기초의학이사를 역임했으며,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정회원이다. 대한해부학회 빛날상, 한국현미경학회 학술상, 고려대학교 석탑강의상, 고려대학교 석탑연구상, 무록남경애 고의의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클림트를 해부하다』, 『핵심신경해부학』, 『국소해부학』이 있다.